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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장

自公有花 2012. 12. 26. 18:25

 

    

 

 배영규 (김배영규)입니다.

오늘 하루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바다를 날고 있는 갈매기들의 화려한 군무^^

나에 실패로 인해 고통 받는 모든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이글을 재구성해 본다.
여러분들은 이렇게 실패하지 말라는 교훈을 주고 싶다.

 

 

 

 

 

누구나 어린 시절이 있다. ^^

나에 삶에 최고 가치는 타인을 도우면서 향기로운 삶이다. 그러나 고의든 과실이든 남에 가슴을 아프게 한 것에 대한 반성과 참회로 시작해서 남은 여정은 삶의 최고의 가치인 여러분을 도우면서 아름다운 향기를 꿈꾸면서,,,

상업주의 화려함 뒤안길에 있는 어려운사람들의 일상의 모습  

 

 

실패를 격고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무작정 상경한 후 이 곳 저 곳 닥치는 대로 막노동과 온갖 잡일들을 할 때 우연히 아르바이트를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도시에 흔히 있는 한평정도의 작은가게 도시에 흔히 있는 한 평 정도의 작은 가게
떠돌이 노점에서 상품을 파는 잡상인 아르바이트를 하였었다. 머리를 조금 쓴다고 할까 사전 조사라 할까 통행인을 파악하고 시간대별 특징을 파악한 후에 가장 효과적인장소와 시간대에 장사를 했었다. 당연히 많이 팔리게 된다. 이를 지켜본 주위 상인들이 내가 가진 상품을 도리하려고 했다. 남은 상품을 넘기고 빈손으로 돈을 받아 오게 된다.

그런 식으로 서울시내 30~40곳을 하게 되었다. 그들 상품을 넘겨받은 상인들은 물건이 떨어지니 당연히 물건을 공급해달라고 했다. 30~40곳에 상품을 공급하는 것으로 매일 바쁘게 되었다. 당시에 전화도 없었기에 상인들은 내게 안정적으로 상품을 공급받을 장소를 요구했다. 한 평 가게를 임차 받았었었다.

 

사진 내가장사를 시작했던 곳은 너무 허름해서 옆 가게사진)
사무실은 불편했다. 내가 없는 사이엔 사무실을 잠궈야 했는데, 물건을 구해주려면 공장으로 가야 하였고, 그 시간은 상인들에게 너무도 고통을 주는 시간이 되었다. 하는 수없이 동대문 도매시장에 한 켠 계단 및 1평 점포를 가게를 만들게 된다. 

 

나를 찾아 헤메이든 상인들이 나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내가 당시에 할 수 있었든 것은 나를 찾아온 손님들이 돈을 벌게 해주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기에 푹 빠진 것이다. 

 

지금은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 도시의 흉물로 전락한 문 닫힌 한 평 가게가 도시에는 많이 있다. 이런 소규모의 가게는 점포운영자에 따라서 운영되기도 문이 닫힐 수 있다.

내가 운영할 때는 줄서서 손님이 기다리든 가게였었다.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보고 누구나 가게만 열면 돈이 벌리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상업시대에서 엄청난 노력이 없다면 단순히 얼마의 투자로 돈이 술술 굴러오는 것으로 기대했다가는 낭패를 보기 쉽다.

 

특히 부동산처럼 투자만 하면 돈이 굴러 들어오는 것으로 생각하는 풍토가 불신풍조를 만든다. 목욕탕을 가더라도 때가 끼고 더러운 상태로 두면 손님이 외면하듯이 애착을 가지고 노력을 해야 상업은 돌아가는 것이고 수입이 창출된다.  우연히 돈이 굴러 들어오는 가게가 어디 있으랴! 밤에는 상품를 전국공장을 다니며 구입하고 낮에는 문을 열면 손님이 줄을 쓰는 것이다.  

 

 

 

생애 최초의 땅 매입사건,
1992년 이렇게 해서 돈이 좀 들어 왔다. 부동산에서 연천에 땅을 매입하라는 제의에 약 700평을 매입하고 대금을 치르고 등기권리증을 받았다.

얼마 있다가 출근길에 강남세무서에서 조사원들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았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잘못도 몰랐다. 시골로 부모 만나러 가자는 것이다.  부모가 상속해준 것이 없는 나이인데 부동산을 무슨 돈으로 매입했느냐고 추궁했다. 장사해서 벌었다고 했지만 막무가내로 검찰에 고발했다.


북부지검에 불려갔다. 젊은 검사가 마구 겁을 줬다. “나도 아직 땅을 못 쌋는데 어디서 돈나왔어, 바른대로 대, 다 알고 있어”

사실대로 아르바이트하고 장사했다고 했더니, 사업했다는 기록이 어딧어?
 안되겠군, 영창가고 싶어?

 

고맙게도 국가에서 최초로 내게 법무부에 1993.3.27 벌금 200만원 부동산특별조치법위반으로 처분의 기록을 올려 주었다.  아마 그게 최초의 전과다.

당시 200만원은 상당히 내게 큰 돈이 였었다.  나는 그 벌금을 분납으로 10개월간 검찰청에 납입 하러 다녔고, 땅을 돈만 주면 사는 줄 알았던 내 잘 못이였다.

 나는 땅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그래서 돈 주고 소개한 부동산은 말만 듣고 구입한 것이고 문제가 되자 부동산은 잠적하였고, 결국 내가 땅 주인이니 벌금을 낸 것이다. 당시 내 부모나 인척이 재산이 있었더라면 피해 갈 수 있었을 텐데,, 생애 최초의 땅매입은 최초의 벌금 200만원 분납 범죄자가 되었다.^^

 

 

보통 도매상의 규모,
 8평~10평 규모, 당시는 이 정도 규모에도 매출 매일 200~500만원은 되었었다.

 

이 정도의 가게의 번영에는 우연이란 없다. 점포가 있어야 하는 건 기본이고 상품의 구매와 매출라인의 점검 관리 모든 노력을 할 때 운영된다. 그러나 보통 시민들은 저런 가게만 있으면 돈버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래 볼일뿐, 실제 운영은 노력이 필요하다. 부동산으로 돈번 사람들은 돈만 투자하면 부동산처럼 저절로 돈이 굴러 들어오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투자와 노력이 수반될 때 운영되고 수입이 오르는 것이니 경영자의 노력 여하에 적자가 날수 도 흑자가 날수 도 있는 것이 상업이다. 

 

그렇게 밤낮이 없이 뛰어 다닌 덕택에 서 너 번의 이사를 하게 된다. 불가피하게 확장을 하고 또 확장을 하고 매장을 넓혀 나갔다. 그런 만큼 일은 더욱 많아져서 근 15년이란 세월을 밤과 낮이 없이 일하게 된다. 한마디로 정신없이 전국곳곳의 공장을 찾아가서 물건을 구해서 손님에게 공급하는 것이다. 낮에 문이 열려 있는 시간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저녁에 대부분의 일이 성사된다.

 

1993년 경부터 수입을 하기 시작햇다. 수입이란 간단한 영어만 알면 할 수 있었다. 보통 수입되는 물품들은 계속적으로 진행되기때문에

품목란과 수량 가격만 체크하면 되기때문에 수입을 하는 무역은 누구나 할 수 있었으나 당시에는 동대문 시장에서 수입을 독점적으로 할 수 있었기에

시계는 매월 1만개 샤프너는 매월 3만개 이런식으로 약20여 품목을 들여왔었다. 그러다 아이엠에프를 격고 환차를 맞기도 했다.

 

당시 도매상 주인들이 모두 명문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 무역을 할줄 몰랐을 때 였다. 돈벌려고만 했으면 충분히 벌수 있던 시절이였던 것이다.

지금도 영어교육을 토익 몆점 토플몆점하고 강요하므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야하는 학생들이 않스럽다. 그렇게 공부해서 과연 그것을 스먹는 사람이 몆이나 될까

어린아이들까지 영어교육으로 내몰고 학원에서 서너시간식 영어공부하는 학생들 자신들이 뭘 배우고 있는지 알기나 하는지 대졸자를 뽑아도 제대로 수출 수입하나 처리 못하는 것을 볼때 마다 아이들 영어 교육을 시켜서 평생 한번만이라도 쓰먹을 수있도록 했으면 하고 생각된다.

 

한번은 1만불을 수입 오더를 중국에 주었더니 중국 인민은행 부행장이 접대를 하는데 79세가 넘는 노인이였었다. 빈손으로 중국으로 와서 사업을한다면 중국내 70만개의 국공기업의 종업원과 융자를 얼마든지 제공할테니 오라는 제의를 받았다.  큰 나라에서 한번 해보라고 했었다.

1994년 용인읍(용인시) 남사면 완장리 논을 매입해서 지은 건평 약 140여 평의 창고건축 부지 약 450여 평 땅 값이 당시 돈으로 3.000천만 원 건축비가 1억7.000여만 원 약 2억 원으로 창고를 건축하였는데, 당시 이웃주민이 오른쪽 보이는 임야 2만평을 1억에(당시엔 이 지역은 농촌으로 공장이 없었다.)  매입해 줄 것을 애원했었다.

한적한 농촌이라 농민들을 너도 나도 땅을 팔아서 택시를 하거나 사업을 하겠다고 하던 시절이였다. 몇 번 계약을 요구했던 땅이 지금은 수백억 원의 보상을 받는다고 한다. 신도시로 편입되어 지금 앞에 도시화 8차선 도로가 건설중이다.

 

이때 당시 2억원은 매우 큰 돈이 였었다. 이 돈을 구할 수 없어 곰곰이 생각하다가 삐삐가 유행하기 시작 하는데 착안해서 여자들 금목걸이 체인을 구입하고  명찰용 집게에 금도금해서  삐삐줄 이라는 걸 최초로 만들었었다. 원가는 200원 정도 당시 들어갔는데 삐삐 대리점들이 몰려 왔다. 삐삐 하나가 몇 만원 할 때 삐삐 줄은 2000원에서 5000원 정도에 팔렸다.


전국에서 도매가 되었으니 공장건축 자금은 뻰지와 가락지(악세사리 조립용구)로 삐삐줄을 만들어  2억원을 조달했다. 없어서 못 팔정도로 내가 최초개발했으니 규격이 나를 모방하는 것이라 계속 변형하며 신제품을 내놓았기 때문에 후발 악세사리 공장들은 더 좋은 제품을 만들어도 시장이 없어 내게로 다 들고와써 팔아줄 것을 사정해야 했다. 그 때 쯤에는 나는 생산을 멍추고 여러 공장에서 제품을 경쟁시켜 판매하면 되었다.


 용인 창고 건축 후부터 나는 항상 1~ 2억 정도를 수표로 바꾸어 아파트 장롱 밑에 두고 장사를 하게 된다. 장사를 그만둘 때까지 장롱 수표는 손님들이 오면 구경시켜 주고 자랑하는데나 사용하고 수시로 시장에서 기간을 바꾸어(기리까이) 비상자금인 셈이 였었다.    

 

 

 

1995~ 무역업을 시작했다.
 수입이란 간단한 영어로 할 수 있었다. 보통 수입되는 물품들은 계속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품목 란과 수량 가격만 체크하면 되기 때문에 무역은 누구나 할 수 있었으나, 당시에는 동대문 시장에서 무역업을 독점적으로 할 수 있었기에  시계는 매월 1만개 샤프너는 매월 3만개 이런 식으로 약20여 품목을 들여왔었다.
그러다 아이엠에프를 격고 환차를 맞아 도산위기에 몰리기도 했었다.

 

동대문에도  명문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 많았으나, 무역을 할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왜냐면 어음강하고 하면 앉아서 쉽게 돈을 벌 때였고, 돈 귀한 시절에 시장에 돈을 이용 돈을 충분히 벌 수 있던 시절 이였었다.

 

지금 영어 교육을 토익 토플 몇 점하고 강요하므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야하는 학생들이 않스럽다. 그렇게 공부해서 과연 그 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어린 아이들까지 영어 조기 교육으로 내몰고, 학원에서 서너 시간 식 영어 공부하는 학생들 자신들이 뭘 배우고 있는지 알기나 하는지?

무역업무가 증가해서 대졸자를 뽑아도 제대로 수출 수입 하나 처리하는 직원을 구해본 적이 없다.  아이들 영어 교육을 시켜서 평생 한번만이라도 쓰 먹을 수 있도록 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대기업에서 퇴직한 중역을 구해서 겨우 무역업을 처리하게 한 적이 있다. 

 

 

한번은 1만 불을 수입 오더를 중국에 주었더니 중국 인민은행 부행장이 접대를 하는데 70세가 넘는 노인으로 내게 “ 중국으로 와서 사업을 한다면 중국 내 약 70만개(약 2.000명 종업원)의 중국 국공기업을 운영해준다면 인민은행에서 융자를 얼마든지 제공 할 테니” 오라는 제의를 받았은적도 있었다. 큰 나라에서 한번 해보라고 유혹을 했었다.  (중국의 대기업 동방그룹 권회장 북한출신 중국 4성장군 최모씨와 자칭 서열 7위라는 도시계획부장관공관에서 밤에 만난적이 있다.) 

 

 

I M F로 쌀 나눔,
1996년 후반기 경기도 안성시 공도면 약 800여 평의 부지를 매입하였는데 97년 IMF가 닥쳤다. 금융위기로 중소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는 사태에 당시 나는 무역업을 하고 있어 달러당 800원에 수입한 대금을 1900원에 막아야 하는 도산직전 상태가 초래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상업을 포기 할 때 였었다. 도산이 즐비할 때라 건축자재가 아주 값이 싸지는 틈을 타서 싼값으로 공장을 준공하게 된다. 상상하기 어려운 금액으로 현금을 투자하여 공장을 건설하였는데 그 후에 앞에 도로가 확장되고 시로 승격되었었다.

 

IMF 사태에 많은 업체들이 도산하고 실직하였는데 나는 당시 무역업을 하고 있어 타격이 회복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수입가격이 따불이 되는데 국내에 건축계가 파산되어 건축자재가 반값이하로 거래되는 것을 이용 공장을 준공해서 그 충격에서 벗어나고 오히려 그만큼 돈을 벌게 된다.(동대문경찰서 김 형사가 짤려서 나는 공사감독을 시켰었다. 그런대 나도 모르게 세금영수증을 3%받고 끝어 줫다는 것으로 몇 년 후 나는 10%를 물어 줬다. 중국으로 도망가서 사업한다더니 화장된 유골로 돌아왔다.)

 

 

IMF로 건설업계가 줄 도산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800여 평부지에 공장을 건축하기로 결심했다. 아이엠에프로 건축자재를 반값에 구입할 수 있는데다 태반이 놀고 있는 인력을 활용하기로 마음먹고 실제 반값에 공장을 건축했었다.

 

그러고 보니 오히려 아이엠에프로 외국에서 수입하는 데는 달러 당 800원에서 1900원에 결재를 해야 했기에 막대한 손해를 보았지만, 건축을 반값에 공장을 지을 수 있었다. 내가 수입업을 하고 있어 건자재가 다 수입되어 시장이 형성되므로 아이엠에프가 시간이 지나면 수입자재로 인해 급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반값에 공장을 짖고 남은 돈은 쌀집에서 쌀을 대규모로 구입하여 아주머니들은 쌀에다 내 이름을 붙여야 된다고 아부를 하기도 했었다. 이름을 내서 어디다 쓰먹냐며, 아주 화를 내고 도시에 필요한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했었다. 어차피 반값에 공장을 지었으니 남는 돈이였다.

 

 

 아이엠에프로 소규모 공장들이 도산하여 실직되어 생계가 일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고 자살이 속출하였든 시절이였다. 내가 너무도 소규모 공장 직원들의 생활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에 그 쌀은 목숨을 많이 구했으리라 생각된다. 

 

 

 당시 쌀 아주머니 한분이 좋은 일 했다고 ‘표창장’을 받았고, 그 연유로 구청에 근무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임시직인지 그것은 모르지만, 그 아주머니가 자신이 표창장 받는 게 뭐하다며 구청에 애기하겠다고 해서 많이 뭐라고 했었다. "당신이 나눠졌지" 그 때 딱 자르고 안면 몰 수 한 덕분에 아주머니는 구청에 근무하고 있다. 

 

 도매상 매일 매출이 5천~9천만 원 하루에 1시간은 돈세 는데 빼앗기는 단순노동에 은행직원들이 파출 나와서 돈을 세어 준다. 월 매출 15억~20억원, (종업원10명) 전국 각 지의 소규모 상인들(5만여 문구 잡화점) 대부분 구매자들90%가 사업자등록증이 없는 현금구매를 하는 소규모 상인들 이였다.

 

매일 읽어나는 현금매출액은 납품업체에 가능한 현금 결재를 하고 남는 순수익 부분만 은행에 최소한으로 예치하여 현금보유를 최소화하였었다. 현금은 납품기업 수입 거래처에 미리미리 장기거래를 위해 공급해서 자금을 터주었었다. 다른 업체에 가면 물품을 납품하고 3개월 어음을 받든 시절 물품 대를 납품즉시 현금 결재를 해주고 더 나아가서 장기적인 거래를 할 곳에는 선금으로 자금을 공급하는 방식으로 현금보유를 가능한 적게 하려고 무던히 애썻었다.

 

당시에 도매상은 물품을 납품 받은 후 3개월 어음을 주고 판매한 대금은 사채를 해서 도매상이 돈 장사를 하고 있었다. 돈이 귀한시절이라 도매로 들어온 자금을 어음 깡을 해주면 하루에 10%의 이익을 가로채는 시절이라 납품 중소기업들은 결재대금으로 받은 돈을 다시 할인하여 현금을 확보할 시절, 모든 중수기업들이 줄서서 우리에게 납품하려고 아우성을 쳤다.

 

바보라도 돈 만 있으면 시장에서 하루에 잠깐 어음 할인으로 10% 이익을 올릴 수 있었으니(관례) 우리정도의 매출에서 돈은 기하학적으로 불어 날 수 있었다, 만일 거래처가 부도가 나도 거래처이기에 물건으로 받으면 되므로 부도가 나도 100% 안전 한 게 도매상 이였다. 오히려 거래처가 부도나면 도매상은 돈이 벌게 되는 것이니 땅 집고 헤엄치기인 것이 였었다. 도매업이 물건을 판매한 대금으로 어음 깡으로 납품 중소기업은  피를 빨리게 된다. 중소기업 사장들은 잠깐 잘나갈 땐 자신이 거들먹거리고 퍼마시고 망할 땐 일가친척을 말아먹게 된다. 망한다는데 어렵다는데 은행이 전 가족을 연대 보증을 세워 물귀신처럼 끌 어 넣기 때문이다. 집안에 사업하겟다는 아들이 나면 부모와 가족들이 한숨을 소리를 해야한다. 다  살았구나!   

 

그러나 나는 그런 것을 하지 않았었다. 그런 것을 하기에 너무 큰돈이 매일 매일 들어 왔기에 매출에서 골치 아팠든 것이다. 바로 바로 납품즉시 현금을 지불했으니 납품업체로서는 우리에게 납품하면 10%벌고 들어가는 것이다. 당연히 제살 깍 아 먹기 하는 도매상들과는 다른 차원의 거래가 이루어졌다. 대기업보다도 나와 거래를 하는 것을 업체가 부러워할 때였고 나와 거래하든 업체들이 지금도 중소기업계에 선두를 하고 있다.

 

 

 

연매출이 수십억원을 넘어가면서 매일 들어오는 현금이 5천만 원을 넘어서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 매일 돈세는 일이 하루 1시간을 잡아먹는 것이다. 은행직원들이 파출 나와서 세어 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다른 일정을 모두 망가지게 하는 것이다. 아무런 부가가치도 없는 돈세는 일로 나를 잡아 맬 때 숨이 막혔다. 나는 돈을 여러 차례 집어 던지고 뛰쳐나가기도 했다.


내가 원하는 일도 아니 였는데 어느 순간 내게는 너무 많은 손님이 쉴 세 없이 들이 밀치고 있었다. 이젠 도망 갈 때 도 없이 상업의 포로가 된 느낌이 였었다. 그렇다고 대부분의 상인들이 영수증을 끝을 수 없는 간이세금사업자 였으니 매출을 은행에 예금해서 돈이 부풀어 져서는 좋을 게 없으니 공장에 갖다 주고 선금을 지급하고 돈을 뛰워야 했다.

 

상인들은  세금을 낼려고 해도 정부는 세금을 받지 않고 뒷조사를 할까 의문스러웠다. 가게는 자꾸 크게 되었다. 위에 보이는 매장 30개를 한 곳에 모아버린 정도의 동대문 역사상 전무후무 한 규모의 도매상을 설립 한 것이다. (바늘 선풍기 드라이기 전자렌지까지 취급)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내가 붙인 간판과 글씨들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고 있다. 그만큼 지금도 내가 한 가게들을 물려받은 사람들은 불경기에도 그나마 가장 호황을 누리고 있다. (정성이 들어간 상품이 많을 수록 손님은 줄을 써게 된다. 2만여 품목 하나 하나 정성과 심혈을 솓은 결과 손님은 줄을 써게된다.)

 

 

 

 

 

월드컵이야기,

도매상을 하고 있을 때 행운 이야기다.
어느 날 어떤 업자가 60년대 초등학교 교재로 사용하든 빨간색 푸라스틱 나팔을 들고 찾아왔다. 연유는 이러 했다. “월드컵에 지정 캐릭터를 만들려는데 은행은 대출을 해주지 않고 가진 것은 60년대 재고 나팔뿐이라 버릴려 해도 몇 차나 되고 돈을 들여야 하니 이걸 처분해주세요,  가격은 개당 50원만 쳐주면 캐릭터제품 원료를 살수 있습니다.”

그만큼 중소기업체에서 나의 신용이 있었기에 최후로 찾아와서 기대는 것이였다. 이것을 새로만들면 원료가 얼마나 듭니까? 한 천원은 들겠지만, 이제 유행이지나 쓰레기로 밖에 처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배사장님은 무역을 하시니 베트남이나 중국으로 수출하면 50원은 받을 수 있겠다는 시장조사까지 말해 주었다. 

않타깝기도 하고 해서 전체 약 10만개를 실어 오라고 하고 바로 현금을 결제해주었다. “신제품 나오시면 가지고 오시고, 캐릭터로 좋은 제품 만들어 돈을 버십시오,” 

그후  월드컵이 열렸다. 온갖 캐릭터를 만든 신제품이 우리 도매상에 독점 공급되었다. 끈끈한 인간관계덕분에 장사는 볼 것도 없었다. 그런대 이변이 생겨 월드컵 4강에 한국이 올랐다.

 

업자들은 16강 정도의 수요만 준비한 상태에서 갑자기 응원용품이 있을 리 없는 상태가 되었다. 나는 창고에 있든 60년대 빨강 나팔에 칼라 스티커를 붙여 상인들에게 무상으로 내주었다. 상인들이 2.000원에 팔아서 1.000원식 가져왔다. 3일 만에 10만개를 1.000원에 매진시켰었다.

돈은 얼마가 되었는지 관심이 없어도 이런 행운은 재미있었다. 이럴 때 돈을 세는 시간이 정말 아까웠다. 당시 계수기가 지금처럼 정밀했었다면,,, 집사람이 나보고 돈을 세라고 할 때 혈압이 올랐고 얼굴이 벌개지고 두통이 났었다.

 

 

 

 

 

동대문 국제무역샾 신축계획은 부셔지고,
이 부지위에 점포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신축 후 입점시켜 주겠다고 한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그로 인해 세입자들 거주자들에게 피해를 주게 되었고, 그들은 내게 속은 것이라 분개했다. 건축허가가 32층 지구로 바뀌면서 신축 허가가 불허되고 5층이 아니라 32층으로 지으라는 것이다. 허 허 ! 

 

물론 보상을 해주긴 했지만, 본의 아니게 피해를 준 것이다.  방법이 없었다. 너무도 않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상태로 서울시와 구청의 정책에 국민은 따라야 하는데 세입자들은 건축하면 1층은 나누어 주기로 한 약속이행을 요구했었다. 

내꿈은 부셔졌다,

온갖 동네 지주들이 몰려다니며 뉴타운을 한다고 땅값을 올리기 위해 부동산에 일부러 호가를 올리는 게 무슨 재주인냥 몰려 왔다. 동대문을 뉴타운으로 고도 32층 지구로 하자는 지주들의 담합 이였다. 나도 당연히 큰 땅의 주인이니 모임에 가고, 재개발 사무실에도 가고 부동산에도 가고 그냥 앉아서 하루에 백만 원씩 올랐다, 천만 원 올렸다. 어떤 사람은 울기도 했다 너무도 땅값이 하루에 올라서 평생 돈을 어떻게 다 쓸 수 있느냐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내 눈에는 정말 “저런 것들이 있나,” 화가 났다.  땅을 필요한 사람들의 용처를  건축을 묶어놓고 집도 못 짖게 하고선 오직 값만 올리고 도시계획만 32층 지구로 해서 기쁘 하다니?

5층 건물을 지어서 국제무역 샾 을 완공하려든 내 꿈을 부셔졌다. 

 

 

[용산참사: 출처 데일리안 ]

 

땅장사에 혈안이 된 인간들,

내가 지주라는 것이 싫었다. 실제로 이 땅을 살 사람도 없는데 지주들끼리 땅값을 올리는 것이다. 그리고 은행은 그것을 보고 감정하고 대출을 해주고, 참 어처구니없지만 현실이다. 부동산 사무실에서 매일 그런 호가를 올리기를 평생의 업으로 한다.  십년~ 이십년 오십년 한다.  자금력이 없는 사람들의 땅을 빼앗기 위해 건축도 못하게 묶어 놓고, 수리도 못하게 일부러 도시의 슬럼가를 만들어 그들의 몫을 가로채기 위해 일평생을 바친다?

 

그게 무슨 성공이고 부귀영화 인지?
대부분  과장 국장의 친인척들~ 여기에 뒷돈은 은행이 대출이라는 이름으로 해준다? 실제 장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은행은 문을 닫지만 이들에게는 후하게 대출해주고 신용을 올려준다.? 무지 한 백성들을 용산 참사에서 보듯이 쫒아내기 위해 돈을 투입해 사조직 조폭 나아가서 공권력까지 합세해서 탄압해야 성공하는 참으로 한심한 도적질은 아닐까?

 

 그땐 하루 5천에서 1억원 돈세는게 싫어서,

하루 현찰로 최고액권인 1만 원 짜리로 오천에서 1억원이 들어 올 때였거든요, 아침부터 거래처 제조업체들 영업 사원들과 하루 평균1백여 명과 기본적인 상담이 있었거든요,   순수익이 매일 수백에서 1천만 원 정도에 하루 약천명의 거래처가 물건을 구매하러옵니다. 오후 4시쯤 은행직원들이 파출 나와서 돈을 세어 줍니다. 이때부터 거래처에 현금결재를 하기 시작합니다. 정말 돈세는 일이 30분 이상 됩니다. 할일은 산적해있는 데 일 초 일각이 너무 소중합니다.

 

아무런 생산성 없는 돈세는 것을 지켜봐야 할 땐 숨 막히는 고통의 시간입니다. 지켜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시간을 뺏습니다. 제가 세 번 정도 돈세다가 돈다발 던져 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돈 귀신이 내게 복수를 합디다. 돈의 고통을 주더라고요


내가 돈을 던져버리고 험악하게 대했으니 지금 돈의 저주와 고통에 뭐라고 원망할 수 없지요.

장사할 땐 너무도 바빠서 일초도 아껴야 했습니다. 가끔 돈다발을 집어던지는 나를 위해 아내는 현금30 만원을 힌 봉투에 담아주며 쓰고 오라고 쥐어줍니다. 돈세는 모습을 보면 미칠 것 같았기에 봉투를 들고 거리를 배회했습니다. 먹고 싶은 군것질에는 1만원도 남습디다. 목욕을 해봐도 1만원으로 잔돈을 남겨 받습니다. 돈이 주는 게 아니라 숫자가 늘어납니다.


가게로 기다리는 고객을 만나러 들어가기 전에 이 돈은 다 쓰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둘러보니 길거리 곳 곳 에는 초라한 힘겨운 생활을 지탱하는 노점상이 보입니다. 제 과거의 모습 이였거든요. 

 

절망하는 그분들 곁으로 닦아가서 봉투를 내밉니다. 저분 친척인데 전해주라고 하고는 가게로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 와서 생기에 찬모습의 나를 찾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불쌍한 모습입니다. 회 한 접시 갈비 이런 것을 먹을 생각도 못했던 것이지요,

 

 

 

수입을 많이 할때라서,

 

한국 전통 문화를 현대적 상품화하여 샘플을 전시 하고선 세계의 바이어들을 초청해서 놀아주면 이들이 새로운 상품을 보고 자신에게 독점을 달라고 하지 않으면 상인이 아니다. 그래되면 전 세계로 수출 선이 확보되고 세계무대의 바이어들을 우리가게에 줄 세울 수 있다는 확신으로 건축을 하려고 애간장을 태웠다. (수원팔달의 로봇, 설악산의 잭크나이프, 경주 황금 브롯치 귀걸이 목걸이, 해인사 등잔, 남해 보리암 은장도, 고창선운사 나침판, 동대문 천흥사 경순공주 복주머니) 월출산의 수저, 북한산의 가위, 금강산 은행 방석) 뭐 이런 걸 만들 기술과 제조업체는 거의 다 나의거래처였으니 조건은 되었던 것이다.

무역 전시장을 건축하게 되면 용인까지 수송 물류를 5층을 창고로 사용하고 2~3층은 전통공예품을 현대화해서 수출하려고 했던 것이다. 한 밤 중에 전국에 공장에 상품을 구매하러 다니면서 느낀 것은 천편 일률적인 모방으로  인건비 경쟁을 하는 게 안타까웠었다.(대구 황금동 무학 성보 등등의 20여 섬유업체가 똑같은걸 만들고 가격경쟁을 했었다.[성남 경기에도 같았다]자세히 보면 비슷하나 조금씩 공장마다 약간 다른것을 알 수 있었다) 같은 기계로 만들어도 공장마다 약간 다르기에 소비자들은 몰라도 공장주들은 자신들 상품을 알아낼 수 있다 이런 차이를 특화해서 다른 문화 상품을 만들게 하려고 했었다.   그 여력으로 수준 높은 문화상품을 전시해서 수입상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무척도 5층 건축 허가를 하면서 기존주택들을 철거하고 바닥을 콘크리트타설 한 상태에서 건축자재까지 모두 주문한 상태에서 32층으로 도시계획이 바뀌고 말았으니 재개발 강패들의 잔치에 나는 돌 지경 이였었다.

 

 

 

백화점은 임대업,

2000년대 초였지, 은행에서 파출 나와서 전표도 해주고 돈도 세어주던 친구들이 내게 말했었다. 당시 삼우텍스프라자 건축으로 분양 후 부실이 800억 원대에 이르러자 자신이 담당이라 대출을 550억 정도 해서 소유를 넘겨 줄테니 운영해 보라고 했다. 수천 개의 점포는 너무 크지 않느냐고 했더니,

 자신이 한국최대 백화점담당 은행지점에 근무한 적이 있다면서 덩치만 크지 수천 개의 점포로 쪼개어서 임대업을 하고 있는 것이지 사장님처럼 크게 하는 사람은 우리나라에는 없을 것이다.  꼬득 였었고 어차피 자신은 부실 담당이라 이제 그 건물과 운명을 같이해서 출세는 글렀으니 관리라도 되도록 도와달라고 했지만 나는 수천개의 점포를 수많은 사람들에게 임대를 하는 것은 적성에 맞지 않았었다.

 

단, 한개의 점포에도 임대료를 받아서 영화를 누리는 것은 상상도 해보지 않았다. 놀면 놀지 말이다. ^^장사를 시작한 이후로 은행 신용은 줄 곳 베스트였다. 아이엠에프 때 한번 일시적으로 은행들이 망하므로 흔들렸었고 단 한번도 베스트 초우량손님이 아닌 적이 없었으며 아마도 전체 국민 중 상위 5% 이내에 있었다. 실제 내가 돈을 은행에 때려 넣었더라면 상위 2%였을 것이다.(온갖 자격증, 소방자격증 건물관리자격증 등등 자격증을 그냥 받을 수 있는 실제 재산가였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나 같은 장사꾼이 한국에 한사람 정도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는  생각이든다. 나야 부패한 사법똘돌이들 작업조에 당했지만, 그래도 이 어려운 시기에 나같은 사람이 지금 세상에 한사람 이 있다면 달려 갈텐데,,  얼마나 좋을까, 내가 그래 했으니 전국에 상인들을  줄서지 않을 수 없었지요, ^^ 

하루에 현금을 천만원 오천만원 센다는 것이 고통이 였었다.

괴로와 하는 나를  본 집사람이 30만원정도 현금을 넣어 다 쓰고 쉬고 오라고 돈 세는 시간 은행직원들이 나오는 시간에 쉬러 가라고 돈을 주었었다.  그러나 하루에 30만 원도 쓸 곳이 없었다. 목욕하고 밥 먹고 남겨 가면 안되었다. 내가 생각한 것이 노점상을 어렵게 하는 사람 주위에 가서, 친 인척이니 이 돈을 대신 전해주라고 하는 것이 대책이 였었다.  그렇게 밖에 돈을 쓸 데가  없었다.

 

 


동대문 일대에 지금도 내가 쓰붙인 간판은 그대로 있다. 수없이 주인이 바뀌고 경영자가 바뀌어도  곳곳에 내가 장사하던 흔적을 지우지 않고 있다. 그만큼 내가 옮겨 다닌 곳곳에 심혈을 기울여 고객들이 돈을 벌게 하려고 노력했다. 아마도 장사하면서 제대로 한번 잠자고 여유있는 시간을 갖지 못했었다. 돈벌려고 장사를 한 것이 아니라 상인들 고객들이 어떻게 하면 돈을 벌게 할까에 미쳐있었다. 그러니 자연히 홍콩으로 중국으로 눈길이 갔고 무역업을 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전국 어디든 가정집에 있는 소품이나 잡화들은 한개 정도는 내가 독점으로 공급했던 물건들이 있다. 


 

 

 

연매출이 수십억원을 넘어가면서 매일 들어오는 현금이 5천만 원을 넘어서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 매일 돈세는 일이 하루 1시간을 잡아먹는 것이다. 은행직원들이 파출 나와서 세어 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다른 일정을 모두 망가지게 하는 것이다. 아무런 부가가치도 없는 돈세는 일로 나를 잡아 맬 때 숨이 막혔다. 나는 돈을 여러 차례 집어 던지고 뛰쳐나가기도 했다.


내가 원하는 일도 아니 였는데 어느 순간 내게는 너무 많은 손님이 쉴 세 없이 들이 밀치고 있었다. 이젠 도망 갈 때 도 없이 상업의 포로가 된 느낌이 였었다. 그렇다고 대부분의 상인들이 영수증을 끝을 수 없는 간이세금사업자 였으니 매출을 은행에 예금해서 돈이 부풀어 져서는 좋을 게 없으니 공장에 갖다 주고 선금을 지급하고 돈을 뛰워야 했다.

 

상인들은  세금을 낼려고 해도 정부는 세금을 받지 않고 뒷조사를 할까 의문스러웠다. 가게는 자꾸 크게 되었다. 위에 보이는 매장 30개를 한 곳에 모아버린 정도의 동대문 역사상 전무후무 한 규모의 도매상을 설립 한 것이다. (바늘 선풍기 드라이기 전자렌지까지 취급)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내가 붙인 간판과 글씨들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고 있다. 그만큼 지금도 내가 한 가게들을 물려받은 사람들은 불경기에도 그나마 가장 호황을 누리고 있다. (정성이 들어간 상품이 많을 수록 손님은 줄을 써게 된다. 2만여 품목 하나 하나 정성과 심혈을 솓은 결과 손님은 줄을 써게된다.)

 

 

 

아름다운 가게 VS 더러운 생업,
내가 아마도 이 무렵 세상이 떠들썩한 아름다운 가게를 둘러보게 된다. 한마디로 느낌 중고품 쓰레기를 모아서 파는 구나! 저걸로 국제 시장에 한국이 쓰레기를 들고 진출하면 어떻게 될까? 충격을 받았다. 왜 장사를 저래하냐, 나는 그 때 그런 생각을 했다. 저런 게 많이 생기면 시장이 죽을 텐데 ,,, 시민들이 거지가 되겠구나!

 시장이 죽는데 뭐가 아름답다는 거지,, ?

 

 

 

하루에 현금을 천만원 오천만원 센다는 것이 고통이 였었다. 괴로와 하는 나를  본 집사람이 30만원정도 현금을 넣어 다 쓰고 쉬고 오라고 돈 세는 시간 은행직원들이 나오는 시간에 쉬러 가라고 돈을 주었었다.  그러나 하루에 30만 원도 쓸 곳이 없었다. 목욕하고 밥 먹고 남겨 가면 안되었다.
내가 생각한 것이 노점상을 어렵게 하는 사람 주위에 가서, 친 인척이니 이 돈을 대신 전해주라고 하는 것이 대책이 였었다.  그렇게 밖에 돈을 쓸 데가  없었다.

 

 


동대문 일대에 지금도 내가 쓰붙인 간판은 그대로 있다. 수없이 주인이 바뀌고 경영자가 바뀌어도  곳곳에 내가 장사하던 흔적을 지우지 않고 있다. 그만큼 내가 옮겨 다닌 곳곳에 심혈을 기울여 고객들이 돈을 벌게 하려고 노력했다. 아마도 장사하면서 제대로 한번 잠자고 여유있는 시간을 갖지 못했었다. 돈벌려고 장사를 한 것이 아니라 상인들 고객들이 어떻게 하면 돈을 벌게 할까에 미쳐있었다. 그러니 자연히 홍콩으로 중국으로 눈길이 갔고 무역업을 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전국 어디든 가정집에 있는 소품이나 잡화들은 한개 정도는 내가 독점으로 공급했던 물건들이 있다. 

시민운동 활동으로 남은 것은?
나쁜 판사 검사를 교수로 만들거나 변호사로 보낸 것,

억울한 누명을 쒸우고
나쁜 짖 하다  쫒겨 난 것인데~
그러고도  선출직으로 나오겠다고 하네,


정곡빌딩 4층에서 개업한 장00부장변호사,
안산에 있는 벤쳐여 검사,
 또는 검사실에서 성폭행을 하는 후안무치한 막가는 검찰이란 오명을 지켜보네,^^

 

나쁜행위로 검찰 하는것보단 변호사가 수입이 더 좋지요^^
양심에 용서 받지 못할 나쁜 행위를 저지른 사람들이 변호를 받을 수 있는 곳 이라네~

 

 

 

배영규(우리농수산연합회장) 제1회 세계한류최우수공로(봉사)대상 수상,

세계한류대상시상식서 봉사대상
한류문화예술신문사 백범기념관에서 개최
[0호] 2011년 06월 07일 (화) 19:37:37 김미란 기자 jinmeilan613@hanmail.net
출처:재외동포신문사진,

배영규 서울시 육상연합회장(8대)으로 서울시25개 구 전역에서 육상 동호인 200만여명중 체육활동이외에 봉사에 참여하는 일명 '담배꽁초 소탕작전' 을 펼쳐 서울이 깨끗해진 봉사정신의 공로, 서울시육상연합회장으로 러시아 중국에 한류의 길을 열어간 노력의 공로가 인정되어 제1회 세계한류최우공로대상을 수상하였다.

 

 

 

 

"진취적이고 우수한 진정한 지도자들이 전세계에 널리 한류를 펼쳐나가자는 취지로 씨았을 뿌리고 길을 여는 노력에 중점을 둔 최초의 시상에 배영규 (우리농수산연합회장) 한.러 경제문화협회 상임자문위원으로 위촉되어 한국드라마를 러시아 전역 국영방송에서 방송되도록 기여한데 일조 하는데 기여 했었다. 한편 제1회 세계한류대상식을 개최한 한류문화예술신문사는 이한동 전 국무총리가 수석고문을, 김덕룡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 이사장이 지도고문을, 남문기 미주총연 회장이 총재를 맡고 있다.(LA 재외동포신문)"

 

 

 

 

 

 

 

 

 

뉴라이트운동 장충체육관에서

 

나는 두레교회 김0홍 목사님을 알지 못하지만. 조우연씨와 함게 구리에 간적이 있었다.(2005 ~6조우현 010-2267-3282)  저녁 무렵 구리 복집에서 두레교회 장로일행 약 15명과 함께 김0홍목사를 복집에서 처음 보게 되었었다.  

 

빈민운동으로 알려진 김목사를 1:1미팅이  아니라 교회식구들과 함께 만난 것이다.

 

대뜸 "자네가 만나자는 용건이 무었인가?"

장사를 해온 내가 꼭 하고 싶었든 말은 "우리나라가 사회주의를 활용하고 이용하는 것이 아닌 근본적으로 공산주의 사상에 입각한 정책은 막아야 한다" 였다.

 

아니 "자네가 내가 누군줄 알고 왔는가,"

"나는 북한 김일성으로 부터 한국사람중에 최초로 공민증 1호를 받은 사람이고 북한 곳곳을 다니고 그곳에 사업을 하는 사람이다."

"나는 오늘 아침에도 노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했고 여러모로 국정을 자문하고 있다. 그런대 자네는 현정부를 엎어야 된다는 애기를 하는가?" 허허 !

 

"김목사님이 북한을 잘알지 않습니까,

저는 장사를 하고 생업에 종사하는 일을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이나라 장래와 후손들을 위해 국민에게 진실을 알려야 합니다." 나는 다시는 볼수 없을지도 모르기에 할말을 다했다.

 

그 순간 굳었든 김목사님이 껄걸 크게 웃었다. 그리고 "여기 소주 좀시시게나"

내 옆에 긴장된 대화를 듣고 있든 나이가 많으신 장로님이 귀에 말로 "아 내가 목사님을 수십년 모셨는데 최근 웃음을 읽어 버렸어 걱정했는데 오늘 처음으로 웃는 모습을 봅니다. 좋은 이야기 잘 될 거 같습니다"라고 속삭여 줬다.

 

장로님이 소주를 한잔 돌리는 사이에  김목사님 "자네 잘 왔네, 자네 확실히 그래 생각하는가,"

"그래서 이렇게 찾아 온 것입니다.저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라의 먼 장래를 볼때도 공산주의적인 정책은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줄것입니다."

김목사"내가 영국에 갔다가 감명받은게 있는데 '뉴라이트운동' 이라는 걸하고 있었어"

김목사"자네 뜻이 그렇다면 내가 사무실과 학교를 준비할테니 물론 훌륭한 강사를 모시고 자네도 강사가 되어 주지 않겠는가?"

김목사"이 나라를 위해 진정한 용기는 제대로 말하고 가르치는게 시급히 필요하다네"라고말했었다.

 

두레교회 장로님들 그리고 우리 일행은 밤늦도록 소주잔을 기울였다. 물론 그다음 며칠후 신림동 관악 서울대입구에 사무실을 마련했다는 전화를 받고 나는 당시 장사를 할때라 멀어서 못간다고 하자 다시 혜화동 '서울대학병원 옆 함춘회관'으로 변경까지 하므로서 참여 하게되었다. 

 

내가 주장한 요지는,
시장의 확실한 자유화 사유화를 통해서 결과론적으로 공유적 사회주의가 요구하는 이상을 실현 할 수 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적인 방법으로 자유주의나 개인의 행복을 추구할 재원을 마련할 수 없다. 는 확실한 신념을 애기했었다.

그런 인연으로  도고 전국 뉴라이트 지부장연수에서  연설을 하고 나니 방청석이 눈물로 훌쩍이는 사람들이 많았었다.(뉴라이트운동은 순수했다}

 

  뉴라이트 운동,  어째튼 그런 인연으로 뉴라이트 총회장 선출당시 지도부는 모두 나에게 회장을 나가라고 강요했고, 또 그래 할려고도 생각했었다. 만일 내가 그때 회장이 바로 되었다면 뉴라이트가  정치에 깊숙히 빨려들지 않게 했을 것이고 나라를 위해 기여할길이 많았을 것인데 아쉽다. 

 

선거가 있던날 내 자동차에 뉴라이트 임원진들이 타고 함께 내가 운전해 가던중 주유소에서 전혀 상상이 안되는 인사사고가 발생하였다. 그 일로 출마를 하지 않았던 것이고 뉴라이트는 잘 못 된길로 가고 말았다고 생각한다.(스팩좋고 학벌좋은 집행부가 국가장래에 대한 개념없이 공사직에 탐닉한 것)

 

나는 당시 거대한 좌향의 무심한 물결을 어떠캐든 돌려서 우측이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수용하고 활용하는 것을 주장했었다. 종북이나 좌향사상에근거한 자유가 아니라 자유위에 사회주의를 수용하기 위해서 늦기 전에 이물결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도 어쩔 수없는 사이에 공산화될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란 점을 김목사님에게 전했고 그인연으로 김목사님을 대신해서 전국 지부창립에 축사를하러 간적도 있지만 뉴라이트란 좋은 운동이 정파에 휩쓸린건 크게 잘 못 된 것이였다.

   

 

뉴라이트 상임대표 김진홍과 박근혜대표

 

 

 

 

 

 

 

 

 



 

 

 

뉴라이트 산악회 행사,

 

 

범민련 평택 반미 시위사태를 잠재우다.

재미 교포가 약 250만에 이르러는 현실에서 미군포함 미국민의 한국 거주가 약 4만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단순히 통일만을 외치며 군사작전을 방불하게 1만여 명에 이르는 반미시위대가 철봉과 죽창을 들고 보름 넘게 평택일대를 해방구로 만들고 있었다.

따라서 뉴라이트 목민 대표로서 평택주민들 이장들 및 향군 전우회등을 통해 다시는 시위를 못하게 하고자 대추리에서 양측이 맞썻고,

이날  시위대는 강제 주민들에 의해 해산되었다. 

 

 

평택 미군기지 반대범대위사태, 평택지역민의?번영회?주민들에게?반미시위?보고를?받고?(뉴라이트?목민회?수석부회장?김배영규)있는?중...고질적인 시위로 경찰과 군인들이 다수 다치고 시위대 또한 무기 죽봉등을 소지하고 1만에서 2만의 대군을 형성하고 전투를 방불하게 하는 시위대를 근본적으로 해체하고자 목민대표 김배영규 수석 부회장은 직접 평택지역의 주민들과 자위에 나섰다.

 

130개 친북단체의 모임인 범대위는 통일이라는명목하에 1만여명이 전국에서모여들어 논두렁에 기를꼿고?투쟁을?전투연습으로?하고..이에 경찰 군? 평택지역 번영회 지역민이 자발적으로 주축이된 자경단 (향군 해병대출신)

 

 

 

 

군사지도 가지고 있는 反美단체
독립신문 기자 () 2006.07.25 12:2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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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기지 이전을 반대하며 평택에서의 反美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범대위 측이, 군사지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되고 있다.

이같은 소식은 22일 연합뉴스의 포토뉴스를 통해 전해졌으나, 이후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관련 뉴스 댓글란에 "군 내부에 간첩이 침투한 것이 아니냐"는 등, 네티즌 의견이 일부 달린 것이 전부였다.

"1/50000 지도는 누구나 구입 가능하다"며 확대해석 하지 말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군사용 지도와 일반용 지도는 내용상 차이점이 많으며 군사용 지도는 정부지도 판매 대행처에서도 절대 판매하지 않는다"는 반박이 이어졌다.

당시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팽성상인연합회 회원들이 22일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 범국민대책위 소속 회원들로부터 평택-천안지역 군사용 지도(5만분의 1)를 압수했다며 유출경로 등에 대한 군경의 해명을 촉구했다.

상인연합회 측은 이날 反美시위에 맞서 미군기지이전 찬성 집회를 벌였었다.

한편 이들의 집회에 참가한 시민단체 활빈단(대표 홍정식)은, 상인연합회가 범대위 측으로부터 압수한 지도 사진을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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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장관급회담 반대 시위,
목민 포럼 공동대표 김배영규는 뉴라이트 를 대표로 기자회견  내외신 160개사의 취재진앞에서  북의 일방적 무도한 공갈로  쌀50만톤 신발4000만컬래 
시맨트 유리 원자재의 요구를 부당한 요구로  직접 북대표 권호웅 일행에게 설명하며. 진정한 평화의 노력을 하기전에는 지원을 할수없다는 국민의 소리를 
전달하고 뉴라이트 회원 10만여 가정를 대표해 요구를 끝내 관철 시키다.  

 

핵만든 북에 대한  지원 물자를 노숙자 및 국내 소외된 계층을 위해  지원하라...우리를 죽이려는 자들에 대한 지원에  반대하고.. .전쟁도발하면  젊은이들 대신 삶만큼 살아온40대이상의  전국민이 싸워 이겨야 한다. 우리 젊은이들을 우리가 보호하기 위해 최대한 해외로 유학을 보내거나 후방으로 보내야한다.  북의 무도한 요구를 좌절시키자!

 

 

  

<6신, 오후 4시 35분> 남측 대변인, "우리 입장 북 지도부에 전달돼"

▶13일 오후 이관세 남측 회담 대변인이 회담 종결 브리핑을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제19차 남북장관급회담 남측 대변인인 이관세 통일부 정책홍보실장은 회담이 조기종결된 13일오후 3시 50분경 내외신 브리핑을 갖고 "우리의 입장이 북측의 지도부에게도 전달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숙소인 웨스틴조선호텔 로비를 빠져나가고 있는 북측 권호웅 단장.
[사진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정택용기자]
▶숙소를 떠나는 차량 안에서 상념에 잠겨있는 북측 권호웅 단장(오른쪽).
[사진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정택용기자]
제19차 남북장관급회담에 참석했던 북측 대표단 29명이 13일 오후 3시 25분경 숙소인 부산 해운데 웨스틴조선호텔을 떠나 김해공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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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명의 북측 대표단은 종결회의를 마친 뒤 곧바로 돌아갔다.
[사진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그러나 이날 북측대표단은 "오늘 부득이 예정된 일정에 관계없이 철수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고 인정한다"며 회담 조기 종결의사를 남측에 알리고 서둘러 귀환했다.

오전에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진행된 남북 수석대표(단장) 접촉은 오전 10시 40분부터 11시 20분까지 약 40분간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남측 회담대변인 이관세 통일부 홍보정책실장은 오후 3시 50분경 웨스틴조선호텔 1층에 마련된 프레스센터에서 내외신 기자들을 상대로 공식 브리핑을 가질 예정이다.

한편 남측 대표단은 오늘 오후 8시 김해공항에서 비행기편으로 서울로 돌아갈 예정이다.

<4신, 오후 2시 50분> 남북장관급회담 종결회의 마쳐
- 북측 대표단 입장담은 성명 발표, 귀환 준비


▶13일 오후 2시 45분경 종결회를 마친 권호웅 북측 단장이 굳은 표정으로 회담장인
누리마루를 나서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오후 2시 45분경 남북 대표단은 누리마루APEC하우스 3층 회담장에서 가진 종결회의를 모두 마치고 회담장을 떠나 숙소로 돌아오고 있다.

북측은 종결회의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밝힌 성명서를 발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측 단장인 권호웅 내각 책임참사 등 북측 대표단은 종결회의를 마치자 굳은 표정으로 곧바로 차량에 탑승해 호텔로 향했다.

북측 대표단은 2시 50분경 숙소인 웨스틴조선호텔로 돌아와 귀환 준비에 들어갔다.

▶종결회의를 위해 누리마루 3층 회의장으로 들어서고 있는 남북 대표단.
[사진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정택용기자]
오후 2시 30분부터 시작된 종결회에서 남측 수석대표인 이종석 통일부 장관은 "2박 3일 동안 편하게 지내셨냐"고 물었고 북측 단장인 권호웅 내각 책임참사는 "숙소 조건은 좋았는데 문제는 숙소 조건이 아니라 사람 마음이다"며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을 대할 때 마음이 아팠다"고 답했다.

이종석 장관은 "종결회의를 원래 5시에 하기로 돼 있었는데, 북에서 일찍 하고 오늘 중 귀환하겠다고 전해왔고 저희도 여러 상황을 고려했을 때 이 시점에서 종결하는 게 낫다고 판단해 양측이 합의 하에 2시 30분 종결하게 된 것이다"고 설명하고 "여러 가지 아쉬움도 있지만 서로 간에 충분히 의사 전달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종결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종결회의는 간략히 마무리됐다. [사진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정택용기자]
권호웅 단장은 "상급회담이 3박 4일이나 그 이상으로 해왔는데 하루 앞당겨 끝난 것이 결실이 없는 것처럼 보여 유감스럽다"며 "우리가 3박 4일 하려는 회담을 2박 3일로 앞당기 듯이 북과 남도 화합하고 단결해 서로 당길 것은 당기면 얼마나 좋겠냐고 생각한다"고 화답했다.

남북 대표단은 오후 2시 34분경 기자들을 물리친 뒤 본격적인 비공개 종결회의에 들어갔으며, 오후 2시 45분경 종결회의를 마무리했다.

<추가> 북측 성명, "책임은 전적으로 남측에"

▶이전과 달리 웨스틴조선호텔 로비에는 전경들이 배치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수석대표(단장) 접촉 외에 특별한 공식 행사가 없어 북측 대표단은 숙소인 웨스틴조선호텔 객실에서 나오지 않아 호텔로비에서 북측 대표단의 얼굴을 보기도 어려운 상황이며, 경찰은 전날 우익단체의 기습시위를 겪은 뒤라 호텔 주변 경비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결국 회담 시한내에 상호 합의점을 찾아 공동보도문 문안을 마련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며 오늘 남북간의 협의에서 대체적인 가부 여부는 판가름날 것으로 보인다.

북측은 내일(14일) 오전 8시 30분 숙소인 웨스틴조선호텔을 출발해 오전 10시경 김해공항에서 고려항공 전세기 편으로 동해직항로를 거쳐 평양으로 떠날 예정이지만 아직 일정은 가변적이다.

 

 

참고] 이날 애국시위로 해운대경찰서장이 직위해제 되었었다. 또 한 기사에는 없지만 당시 우리일행이 구금되자 경남부산일원 해병전우회 재향군인단체들이 udt단체들이 삽시간에 몰려들어 경찰로 경호가 불가능해졌었다. 당시 지역 애국단체들이 삽시간에 수없이 몰려들고 충돌이 계속되자 북측에서 우리에게 직접 돌아갈 것이다. 라고 말했고 그후 정부발표가 나면서 서둘러 돌아간 것이다.

 


 

 

 

 

 

 

 

 

 

@사진은 서울특별시장기육상대회 우승 시상식후 기쁘하는 수상자들과 이를 축하하는 육상연합회장 기념촬영장면,

 

 

 

 

 

사진은 대구대회개회식전후사진임

 

 

출처: 대구육상연합회

 

 

 

 

 

 

 

오세훈 서울 시장을 대독하여 서울시장상을  시상을 하고 있는모습

 

 

 

 

스포츠한국 주최 녹색성장 마라톤대회  서울시 200만 마라톤 걷기100만 동호인을 대표하는 서울특별시육상연합회장(배영규)  축사및 우승 완주자에 일 일이 직접 손수 시상 하시는  장면, 특히 시각장애인 마라톤을 주최하여 감동의 행복 축제장으로 승화 한(스포츠한국 마라톤대회)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최초의 시각장애인 마라톤에서 수상자들이 기쁘하는 모습

 

 

 

 

 

 

 

 

장사가 안 되는 데는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온 가족이 동원되고 동원될 모든 인력이 붙어 수리를 합니다. 그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일 수도 있지요,  모양이 바뀌고 새로운 작품이 나옵니다. 그때 마다 즐거움은 배가 됩니다. 우리의 위대성을 느끼기도 하지요,

 

주위에서 부럽게 봅니다. 투자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해보지 않으면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모양이 바뀌면 호기심 때문에 사람들은 몰려옵니다. 이런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의논도 합니다. 정말 새로운 모습의 세계가 그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손님이든 호기심에 온 분이든 상담하고 의논하고 교감하는 즐거움에 푹 빠져듭니다.  

돈 때문에 수리하고 고치는 것이 아니라 헌것과 낡은 것을 고치는 즐거움은 때가 낀 개 밥주발을 새것으로 만드는 희열과 같은 것입니다.

모든 장사는 때가 있습니다.  수리를 하고 붙어서 씨름을 하다가 보면 적나라하게 현실을 알게 됩니다. 언제가 방학이고 월급날이며 돈이 돌고 어떤 대에 손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당길 때와 세일할 때 또 정성을 쏟아야 할 시점도 알게 됩니다. 막연히 안 된다고 푸념하는 사람들은 방학 때 휴가 때 아무도 없는 틈에 신경 쓰다가 정작 손님이 몰려 올 땐 지쳐서 나자빠집니다. 그럴 때 저는 친절히 손님을 몰아서 담습니다. 그러기위해 투자를 하고 시설을 개수하고 기다립니다.

상업은 백년 천년 오랜 시간 종사한다고 근로자들처럼 임금을 받지 못합니다. 하루를 해도 잘하면 다 먹게 됩니다. 하루만 장사를 제대로 해도 십년을 한 사람보다 더 큰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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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 총선과 대선 전망 배영규 칼럼니스트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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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은 60년 만의 임진년 '흑룡의 해' 배영규 칼럼니스트 [12.31]
임진왜란을 미리미리 잘 준비하고 대응 하였더라면 아주 일본을 혼내 줄 수 있었듯이 잘못하면 재미있는 구경하다가 초가 삼칸 다 태울 수도 있는 불안이 함께하는 2012년 임진년 흑룡의 해에는 미리 미리 유비무환으로 준비하여 용처럼 승천하는 ..
[논단] FTA는 경제 공동체, 반미는 안돼 배영규 칼럼니스트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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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FTA비준 8년만에.. 반대하는 판사들 배영규 칼럼니스트 [12.02]
지난 8년간 아무런 말도 없던 판사들이 쪽수를 믿고, 일국의 대통령이 서명 할 때까지 내용을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면 정말 국민들은 사법부를 신뢰 할 수 없다. 국민에 입장에서 편가르기 사법부는 개혁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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