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중국을 지배했던 국민당
국민당은 1913년 2월 선거에서 제1당이 되었으나, 위안스카이의 쿠데타로 해산 되었다. 쑨원이 1914년 中華革命黨을 조직하고, 1919년 ‘5 ·4운동’의 영향으로 본부를 도쿄에서上海로 옮겨 중국국민당(中國國民黨)이라 개칭하였다.
중경 화평교섭회담,
중국에 진주한 일본침략군이 항복한 1945년 8월 15일,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공산당의 모택동[毛澤東]이 충칭[重慶]에서 화평교섭회담(和平交涉會談)을 개최하고, 쌍방은, 1.내전회피, 2. 정치협상회의 개최, 3. 각 당파의 평등한 지위 승인 등에 관한 협정을 논의하고, 그 결과 10월 10일 ‘국공쌍방 대표회담 기록요강’, 즉 쌍십협정(雙十協定)을 발표했다. 주요내용은 ‘어떤 일이 있어도 내전을 피하고, 독립 ·자유 ·부강의 신중국을 건설한다’라고 합의하였다.
장개석은 4대 1이라는 압도적 군사력을 배경으로 제3차 화평교섭 회담을 거부하고 공산군을 토벌하고자 했고, 모택동도 강경히 게릴라전으로 응전태세로 나왔기 때문에 마침내 1946년 전면적인 내전으로 돌입하게 되었다.
국공 내전,
1936년 초 공산당의 세력은 붕괴 직전으로 인민으로부터의 지지가 없어 티베트를 지나는 대장정을 하면서 주력 부대는 궤멸되다시피하여 배고픔으로 병사들이 티베트에서 시민을 약탈하다가 오히려 반격을 받아 다수 공산군이 사살당하고 (모택동이 티벳에 피바람을 불어오는 주원인) 엉망진창의 상황이 되었다.
서안사건과 모택동,
궤멸되다 시피한 홍군에 대한 장개석의 마지막 공격이 당시 서안 사건에 의해 중지되고, 먼저 일본과 싸우자는 여론 때문에 대일항전에 국민당군이 집중하고, 장개석은 항일전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나, 홍군은 국민당군 휘하 8로군과 신 4군으로 편성되었다.(홍군은 장개석 명령은 전혀 듣지 않으며 기생작전)
국민당군은 중일 전쟁 초기 장개석 직계의 중앙군을 중심으로 상해, 남경 주변의 군벌군과 함께 (당시 중국은 중앙군과 군벌군으로 2원화된 군사 조직) 상해, 남경 부근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했다.
일본군과 전쟁초기 일본군은 오송 적전 상륙으로 알려진 전투 등에서 약 4만 명의 사상자를 내며 엄청난 희생을 치루게 되었다. 당시 차이팅카이 휘하의 국민당군 19로 군은 상해의 오송부두에 상륙한 일본군 3사단을 전멸시켰다.
장개석 중앙군과는 달리 지방 군벌군의 한심함으로 일본군은 지방 군벌군의 틈새를 뚫으며 중앙군을 포위 섬멸하면서 연전 연승하게 된다. 장개석이 독일과 소련과 협력하여 키워놓은 중앙군의 60%가 이때에 사라지며 유능한 초급장교 12,000명이 이때 전사하였다.
국민당 군 = 당나라 군대 = 오합지졸,
어쨌든 군비 착복과 부정부패, 병사의 피복비와 급식비 이것을 모조리 빼돌리는 부패한 지휘관들을 모시면서 싸워야했던 국민당군 군벌군의 병사들의 전투력은 1만의 일본군에게 수십만명의 군벌군이 전멸되는 일이 당연했으며 후 일 공산군과 전투가 될 수 없었다.
백단대전,
백단대전 에서 공산군 5만 명이 일본군을 공격하여 일본군 2.000명 정도를 전사시키고, 공산군은 약 2만 명을 전사를 지휘했던 주덕이 모택동에게 끌려가서 혼났다고 하는데, 모택동도 전력의 10%만 항일전에 투입하고 90%는 향후 있을 장개석과의 전투를 대비하자는 것이 이미 이때 보인다.
모택동군의 주력은 만주군관 출신,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장개석과 국민당은 대일 항전 승리의 주역으로 종전을 맞이 하였으나, 만주에 진주한 소련군이 만주의 주도권을 모택동과 홍군에게 넘겨주었기에 일본의 괴뢰정부인 만주군은 일본군과 비슷한 급료에 일본 정규군 못지않은 정신 무장과 장비로 최강의 강군을 모택동은 흡수할 수 있었다.
미국의 중재로 쌍십협정, (1945년 10월 10일 국민당과 모택동의 평화협정)
국민당에 침투해있던 수많은 공산당 첩자들, 국민당 주력부대 장개석의 휘하 장교들 사령관 중에 공산당의 지령을 받는 사람이 많았는데, 장개석도 이런 것이 대단한 우월감으로 생각하였겠지만, 모택동은 이들로부터 입수한 정보를 활용 전투를 준비하며 대규모의 부대를 북경 북방에 위치한 산해관에 집결시켰다.
1945년 11월 먼저 장개석이 협정을 어기고 5개 사단 규모의 (5만 2천명) 장개석 정규군은 산해관으로 출진시켰다. 국민당군은 정보를 휜히 알고 있는 산해관에 배치된 공산군 20만 명에게 포위당하고 모택동은 팔로군에게 총공격 명령을 내리게 된다.
당시 팔로군은 대규모 군대와 싸웠던 정규전의 경험은 전혀 없었으며 게릴라는 전술에서 적의 대규모 부대를 만났을 때는 전력을 아껴서 안전지대까지 후퇴하였다. 모택동 군의 팔로군은 1946년 1월까지 거의 최악의 게릴라였다. 제대로 된 정규전의 경험이 없으며 협동 작전의 경험도 없었고, 임표, 팽덕회, 주덕, 주은래 등이 그 정도 였다.
산해관전투와 모택동군의 궤멸,
산해관 전투에서 국민당군을 포위한 모택동 군 20만은 궤멸되고, 당시 전투를 지휘했던 국민당군 사령관 탕은백 장군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우리 부대에게 가장 힘들었던 일은, 포로를 수습하고 적의 무기를 노획하는 일이었다." 결국, 1945년 11월부터 1946년 1월까지 국민당군은 전 만주를 거의 석권하고 모택동이 숨어있는 외몽고 자치주만 남게 된다. 공산군은 만주의 산악지대와 사막에 숨어서 게릴라 전만 시행하는 신세가 되었던 모양이다.
1946년 1월 소련의 스탈린 선언,
위기를 느낀 스탈린이 모택동을 지원 할 수밖에 없게되어 선언을 한다. '북만주와 외몽고 지대의 혼란은 우리 소비에트에게 심각한 위협이며 따라서 외몽고 지대에 주둔한 우리 위대한 쏘비에트 전사들 100만은 후방의 안전이 확인된 후 철군할 것이다' 소련과의 분쟁을 두려워한 미 행정부는 장개석에게 소극적 휴전을 부추기며 압력을 넣게 된다.
미국은 현상유지를 원해서 국민당지원을 중단한다.
미국은 중국 대륙이 평화롭게 안정되어 유럽전선을 안정시키고 싶었으나 국민당 때문에 그렇지 못했다고 장개석지원을 중단하게 된다. 1945년 11월 이후 미국의 대 중국 지원은 급격히 줄면서 1946년 1월 이후 미국의 지원은 거의 없어지게 된다. 미국이 소련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으며 국민당은 빈번히 소련을 자극했고 모택동은 소련에 빈번히 지원을 요구하였다.
소련은 20만이나 되었던 중국계 만주군 포로를 전원 공산군에 편입시키고 일본군 관동군 교관단 10만을 동원하여 강군으로 훈련한다. 막대한 소련제 무기와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무기가 공산군에 제공 되었다.
미국 무기체계에서 미국의 원조중단,
홍군과 국민당군의 전력차는 바뀌었다. 장개석군은 초기의 물량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대미 원조가 끊기면서 (미국 공화당 정부, 민주당의 모택동을 우호적) 장개석의 주력부대 신일군, 202사단, 199사단, 207사단, 74사단, 청년군, 요요상 휘하의 12개 기계화 사단 등은 고질적인 연료 부족과, 미제 캐논포에 장착할 포탄 부족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
1946년 1월 부터 6월까지는 전면전이 없이 국지전과 게릴라전 양상의 휴전은 46년 6월부터 본격적인 공산군의 반격으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는데 장개석은 손을 쓸 수 없게 된다. (모택동은 공산군을 120만의 정예 강군으로 무장 시켜놓았고, 이때 이미 기갑 사단을 편성하고, 소비에트의 원조물자가 상당량 공급되어 모택동은 여유있는 전투를 하게 된다.
미국의선거 루스벨트와 트루먼대통령,
루스벨트에 이어 트루먼이 대통령이 되기 불과 몇 달전에 장개석의 국민당은 몰락했다. 미국의 군사무기는 상업주의 토대 위에 제작된 것으로 유지비가 많이 든다. 공산군의 무기는 총알만 있으면 유지되는 차이점이 있었고, 미국의 지원이 끝어진 국민당군의 주요군사무기의 약 60%가 작동이 불가한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고철상태로 전장으로 끌고 다니는데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국민당정부는 민심이반으로 1947년 말부터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세력관계가 역전되기 시작하여 중공군은 전 전선에 걸쳐 총반격을 개시하여 세력권을 확장해 나갔다. 국민당정부를 (臺灣)으로 몰아내고 1949년 10월 1일 중국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현재 대만 인구는 약 2.100만 명에 이르는데 수백만명의 죽을 목숨을 살린 섬이 바로 대만이다. (섬은 매우 중요하다)
국민당 정부군 480만의 필연적 궤멸원인,
국민당 군은 480만의 병력 중에 만주에 투입했던 병력은 30개 주력 사단과 20개 방계 사단 총 50만 정도였다. 장비는 장개석군이 좋았으나 국민당 중앙 수도가 있던 남경에서 수천 km 떨어진 만주까지의 보급은 어려웠으며, 지원 부대나 병참부대 역시 긴 보급로와 형편 없는 도로망을 거치면서 전방 부대의 보급을 악화 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여기에다 부패한 군벌들의 수탈로 전투력이 형편없어져 가고 있었다.
부정부패한 군벌과 장개석 국민당군,
장개석 후방 부대의 부정부패, 보급부대가 자기 관할 구역에 들어오면 이곳저곳에서 뜯어먹는 부패한 국민당군 지방 군벌의 행태와 장개석 휘하에 공산군과 내통하여 피아를 구별 하지 못한 것들로 인해 주적 개념이 애초에 없었다. 정예화된 공산군 120만, 거기에 공산군은 지리적 이점까지 더해서 똥개가 제집에서 시작이 반이 듯이 식은 죽먹기였였다.
국민당군은 공산당 출신들을 선호,
46년 7월부터는 고전하게 된 이유로 국민당군의 주요 장군이나, 장교들이 황포군관학교 출신이었는데, 황포 군관학교는 1924년 1월 혁명군 간부 양성을 목적으로 1차 국공합작 후, 손문의 요청으로 소비에트의 코민테른 지원하에 세워진 학교이다. 정치부 주임으로 주은래가 있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상당수의 인물이 공산주의 인사였으며, 당연히 이곳 출신중에 공산당원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공산당은 미래를 예상하고 이곳에 자신들의 세포들을 많이 심게 되었고 이들이 훗날 국민당군의 중추로 편입되어 국민당군 패전에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된다. 국공내전 초창기, 압도적으로 국민당군이 강할 때는 이들의 역할이 없었으나, 양쪽의 세력이 비등해지면서 이들의 활약은 전황 자체를 공산당쪽으로 유리하게 만들게 되었다.
국민당군의 지휘관들은 정예부대를 적의 매복지역인줄 알면서도 진격시키거나, 강력한 포병대를 호위 부대 없이 이동시키고, 그 부근으로 공산당 주력 부대를 투입시키도록 유도하여 국민당군의 중포를 접수하였는데 국민당군에게 치명적이였다.
46년 6월 소련군이 만주로부터 철군한 후, 충분히 무장된 공산군은 본격적인 반격을 시작하고 5개월에 걸친 휴전기간 공산군에게는 전력의 수혈과 집중을 가능케했던 반면에 국민당군에게는 내부의 모순이 들어나며, 전의 상실, 기회 상실이라는 악재로 작용했다.
한쪽의 전력이 압도적일 때는 별로 효과를 보이지 못했던 공산출신 간부들의 암약도 양측의 전력이 비슷해졌을 때는 엄청난 효과를 보이며 국민당군을 각지에서 전멸로 빠뜨렸다. 46년 7월부터 도시와 주요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국민당 주력부대는 각 지역에서 공산군에게 포위를 당하게 된다.
도시 밖으로 적을 공격하려고 해도, 이미 공산군에 넘어간 장교나 장성들이 그 정보를 그대로 공산군에게 넘겼고, 도시 밖으로 나간 국민당군은 그대로 포위 섬멸되기 일쑤였다. 국민당군은 하나둘씩 궤멸되기 시작했고 장개석군부 내에는 고급지휘관들만 쳐다보면서 특단의 대책을 위한 실패작전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국민당군은 희망이 없이 패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 이였다. 47년 3월에 있었던 옌안 공략전에서는 후쭝난 장군의 옌안 방면군이 전병력 3분지 일을 잃고 괴멸되었으며, 정인입 장군의 4 사단이 5개 사단 규모의 홍군에게 포위 되었다가 전멸되었다. 정인섭장군은 끊임없이 지원을 요청했지만, 사령관 위립황은 끝내 지원을 거부했다.
장개석이 가장 아꼈던 청렴했던 장영보 장군이 자기 휘하의 직계 74 사단으로 20만 중공군, 회동 야전군의 포위망에 갇혀 한달 동안 버티다가 사단 병력과 함께 전사하게 된다. 직할 사단인 74 사단은 최후까지 전원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전멸하였다. 그 후 공산군 5종이라 불리는 회동 야전군 주력도 더 이상의 전투를 중지할만한 타격을 입게 된다.
장영보패전은 장개석에게는 더 이상의 전략적 승리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공산군의 대다수가 만주와 동북지방이 고향인 지역민인데 반해서 국민당군의 대다수가 광동, 절강, 섬서성 등의 수천 km 떨어진 지역이 고향이었다. 홍군은 고향을 지킨다는 의지로 싸웠고, 국민당군은 장개석 휘하의 고급참모로부터 잘 못 보여서 징발되어 수년째 고향을 떠나 기약없는 전쟁을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파벌군벌인 국민당과 일사불란한 모택동군대,
국민당군은 형편없는 군벌군 출신의 방계군 수십만을 만주로 보내는데 1947년 5월부터 90만의 방계군이 동북 전투에 참가하면서, 장개석은 상황의 변화를 꿈꾸었지만, 장개석의 남경 정부와, 위립황 총사령관의 북경 지휘소, 군벌군의 개별 지휘소에 따른 파벌우선적인 명령 체계로 인해 전의가 상실된다. 공산군은 하나의 총사령부에 의해 지휘되었기에 상대가 되지 못했다.
장개석군대 고급지휘관들이 공산군 출신이 많았기에 방계군의 졸병들 수십만 명은 기회만 되면 공산군에 투항하여, 공산군의 전력만 보강시켜주는 황당한 상황이 되어 중앙군이 전투를 할수 없었다. 후방의 방계군이 1/10의 중공군에게 괴멸당해서 전방의 중앙군을 포위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여 전황은 국민당군에게 극히 불리했다.
미군무기의 상업성 문제,
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군으로부터 증여받은 최신무기가 소모품, 포탄, 기름이 부족해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데 미국은 장사의 나라라 공짜지원을 급작스레 중지했다. 더군다나, 최신 무기일수록 소모품이 많이 필요하며 소모품이 없을 때에는 순식간에 고철이 된다. 고철도 버리지 못하고 끌고다녀야 하므로 국민당군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국공내전 후 상당량의 미제 무기가 중공군에게 노획되지만 맥심 기관총이나 M-1 소총, 산포등을 제외한, 155밀리 유탄포나, M3, 4 전차들이 중공군의 주요 무기로 사용되지는 못했다. 중공군 역시 이들에게 사용할 고급상업연료, 소모품, 규격에 맞는 포탄들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M4 셔먼 전차나 M3 스튜어트 전차 자체도 공산군의 전차인 97식, 95식 보다는 우수했지만, 이들의 연료로 쓰이는 경유는 턱없이 부족하여 최정예 요요상 기계화 부대의 60%가 가동불능 상태에 빠진 상태에서 무리하게 요서 공략전을 명령한 장개석은 무능했고 그 휘하 지휘관들은 공산당출신임을 자부했지만 공산당으로부터 요서에서 전멸하게 되었던 것이다.
요서에서 국민당군 주력 부대를 전멸시킬 때 소련제 T 34 전차가 다수 제공되었음을 구소련 몰락 후 해제된 극비 문서는 전하고 있다. 1947년 5월부터 48년 11월까지 국민당의 최후 공격과 공산군의 반격전으로 요양, 심천 전투로 표현되는 중국 동북부 전투에서 국민당군 주력부대 50만 및 방계군 90만은 괴멸되었다.
장개석이 산해관에서 굳건한 방어선을 지키며 내부의 부패를 척결한 후 여유있게 국공내전을 진행했다면, 주력부대 20만으로도 산해관의 방어선은 무너지지 않았을 것인데,^^ 고급 참모들이 공산당출신으로 정보가 새나가고 이들은 공산당과 더욱 친밀했고, 장개석은 이들을 역이용하고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아래로 갈수록 공산당에 줄써는 현상을 장개석은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장개석의 중요한 지휘관 항복을 거부한 모택동,
48년 12월 장개석의부하 부작이 휘하의 50만 국민당군을 이끌고 항복을 요청했으나 모택동은 거부하고 천진과 북경에서 일망타진했다. 부작의는 전면전 이전에 공산군에게 항복을 하고 싶어했으나, 공산군은 좀더 확실한 승리와, 인민에 대한 선전 효과, 50만 군을 이끌고 항복했을 때 부작의가 요구할 정치적 지위, 50만 방계군의 혼란 및 저항을 염려한 모택동의 거부로 인해 중공군은 부작의의 국민당군을 철저히 괴멸시키고 북경을 점령했다.
국민당군 고급지휘관들이 정신적으로 공산군에 우호적이였기에 항복을 요청했어도 모택동은 이들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 국민당 주요 인사들이 내륙에서 살길이 없어지자 대만섬으로 탈출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중요한이유이고 이로 인해 중공은 매우 안전한 국가를 정비할 수 있었다.
마침내 장개석의 고급 지휘관들의 항복을 거부하고 처단함으로서 49년 1월 31일 마침내 북경은 공산군에 의해 점령되면서 국민당의 중국 지배는 종말을 고하기 시작되었다.
장개석은 내부의 부정부패, 주요 생산 시설과 해안 도시를 상실함으로 발생한 재정 부족, 국민당의 치명적 문제인 공금 횡령과 자금 유용, 실력과 능력보다는 학벌과 재력으로 귀족자제로 구성된 국민당군 지휘관의 재능은 형편 없었다, 그러나 군벌 제도에서 귀족자제로 구성된 지휘관에 대한 능력위주의 인사는 불가능했다. 장개석은 개혁을 하지 못했고 모택동은 개혁과 전쟁을 동시에 했다.
국민당군은 대만으로 쫓겨난 후 해군 공군이 타이완 방어전이나 금문도 혈전 등에서 혁혁한 전공을 거두며 대만을 구하는데 일조를 하였다. 수백만의 죽지 않을 수 없는 목숨을 살릴 수 있었던 지정학적인 섬이라는 유리한 조건 때문에 방어가 용이 했고, 모택동이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섬으로 대피하지 않으면 대량의 보트피플이 생겨 바다에 수장될 처지도 작용했다.
게릴라의 악탈과 국민당군의 약탈은 다른 것이다.
국민당군은 민중의 것을 악착같이 빼앗고, 약탈하는 도둑떼라고 알려졎고, 홍군은 민중의 것을 지켜주고 음식을 나누어 가지며, 생명을 중시하는 전시에 볼 수 없는 천사의 모습을 갖고 있다고 선전해 왔다.
국민당 방계군의 열악함이나 기강 해이는 배고픈 병사를 순식간에 도적떼로 변화 시켰으며, 실제로 욕심많은 국민당 군벌 출신 장군들은 자신의 군대를 이용하여 백성들의 것을 빼앗았다. 방계군 외의 상당수 중앙군도 방계군보다는 덜했지만, 이들의 영향을 받아서 권력적 약탈 행위에 가담했었다.
국민당정부의 권력형 부정부패는 공산군 간첩들이나 선전 기관에 의해 크게 부풀려져서 대중에게 퍼지게 되었고, 국민당군의 민심 이반을 가속화 했다. 국가권력을 이용한 약탈은 그게 사소해도 민심이반을 수반한다. 제도 권력형 공직자에 의한 부정부패는 망국을 부추기는 범죄이다.
공산군 역시, 대다수의 병사가 강제로 모집된 징집병이었으며, 전체 징집병 중 10%에 달하는 10만을 사상 무장이 안된다는 이유로 처형했다. 공산군이 항일전과 국공내전 기간동안 전력을 증강하고 유지하기 위해 소모된 막대한 물자가 모두 인민으로부터 강제로 징발된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전쟁기간중에 약탈은 비슷했겠다. 그러나 이들은 분명 정부없는 게릴라였지 국가 권력은 아니였다.
공산당은 본래 인도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1948년 5월, 공산군은 장춘을 포위하고 국민당 60군을 압박하고 장춘의 약 100만 시민이 고립되어 기아와 질병에 시달렸으며, 수많은 인민들은 굶어죽고, 국민당군 사령관 증택생은 인도적으로 도시 밖으로 시민들을 내보낼 수 있게 해달라고 중공군에게 요청하지만, 중공군은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도시 밖으로 나오는 8.000명의 시민을 남녀 노소 가리지 않고 사살했다.
1948년 12월 국민당군은 항복하고 공산군이 장춘에 들어갔을 때 20만구의 민간인 시체를 확인하였다고 한다. 전쟁이라는 것이 비극으로 인도주의와는 거리가 먼 인명을 살상하는 것이다.
내가본 결론,
정치나 관료에 있어 하급 지휘관들은 고급지휘자를 모방하는 현상이 있는데, 장개석은 매우 똑똑해으나 공산출신 지휘자를 고급장교로 배치하는 실책을 범했고, 이 에 따라 하급장교들도 공산당을 은근히 따르게 되어 장개석은 걷잡을 수없게 되었다.
국민당군은 조직적인 저항을 하지 못하고 전반적인 패전과 붕괴 속에서 무너지며 장강 방어전까지 무너지면서 대만으로 탈출하였다. 전쟁이라는 것이 양쪽에 재정적인 악화를 가져오는 것은 당연하지만, 국민당군벌의 부패는 전쟁 비용을 확실히 증가시켜 장기전에 민심이 반을 초래 할 수밖에 없었다.
국민당군이 군벌에 대한 구조조정이 우선 필요했는데 기회를 상실하였던 것이다. 반면 공산당군은 게릴라전이 많았기에 들어나는 부패가 비교적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게릴라는 정부가 없어 약탈이 공산군의 책임이 아니라 게릴라의 (도둑)책임이였다.
모택동은 게릴라전으로 힘을 비축한 후에 승산이 있을 때 까지 장개석의 휘하 고급 지휘관을 자기 편으로 포섭하였기에 장개석 휘하에서 많은 정보를 받았으며, 장개석 휘하에서 중급 지휘관이나 일선 지휘관들이 스스로 들 공산군과 통하는것을 은근히 자랑으로 여겨졎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정치 현상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런 틈에 공산군은 각개격파의 작전을 전개하면서도 점령권 내에서 (토지개혁)을 추진하고 정치적 ·군사적인 기반을 확실하게 함으로서 장기적인 토대를 구축했으나(‘인민민주통일전선’을 결성) 장제스는 우왕좌왕 전쟁에 임시방편을 많이 사용하여 급격히 쇄락해져 가고 있었다.
국민당이 대만섬으로 탈출하였는데, 중공군은 내륙에서 여러차례 국민당군의 항복요청을 거부했기에 더이상 다른 방편이 없었으며 대만이란 섬이 없었다면 보트피플이 대량 발생했을 것이다. 대만섬은 수백만명의 죽어가든 목숨을 살린 기적의 장소이며 2.100만이 살아가는 생명의 터전이 되었다.
한국의 6.25전쟁,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얼마 전 중국 장개석 정권이 몰락해서 대만으로 쫒겨가고, 중국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1949년)을 선포한 사건이 있었다. 중국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던 국민당정권이 붕괴하면서 미국이 아시아방어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하는 결정을 한 중요한 이유도 국민당정부의 붕괴 때문으로 북한, 소련, 중국 등은 한반도 적화를 용인하는것으로 오해하여 6.25가 발발 하여 미국은 전쟁초기부터 오판을 거듭했는데 아시아 사정에 어두웠다.
미국의 아시아 방어선 한반도 제외 결정에도 불구 하고 미국이 6.25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던것은 장개석 정권의 몰락에 의해 서방국의 방위가 위험한 이유때문이다. 6.25는 대만 일본과 미국본토 까지 안전을 담보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였기에 연합군이 참전을 하지 않을 수없게 되었으며 스탈린과 김일성은 미국이 한반도에서 쉽게 철수하고 일본만을 방어 하리라 오판했던 것이다.
베트남의 적화나 중국국민당의 몰락은 부정부패 때문이다. 특히 공권력의 부패는 어떻한 경우에도 용납해서 안되며 엄단해야 한다. 부정부패 문제가 나오면 권력은 사적인 민간인에 대한 단속을 되풀이 하는것으로 피해가고 또 그렇게 하는척하고 민간인을 단죄하는것은 전혀 방법이 될 수 없다. 공권력은 국민의 뜻과 다르게 사용되면 그 자체가 범죄라는 인식이 있도록 엄단했더라면 국민당군이 당나라군이라는 소릴듣지 않았을터... 2011.06.05 (자료:백과사전 기타 )
(배영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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