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게시판

송상현

自公有花 2014. 10. 27. 20:03

1592년 음력 4월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휘하는 왜병 5만은 무인지경같이 수영을 거쳐 1592년 4월 13일 오후 20만 여명의 왜군은 9개 부대로 나누어 시차를 두고 조선을 공격 하였다.

 

제1진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부대는 700여척의 전선에 병력 1만8천7백 여명을 태우고 4월13일 아침 8시경 대마도의 오우라항(大浦港)을 출발 하였다. 그 날 오후 5시에 부산 앞 바다에 도착하였고, 다음날인 14일 새벽에 부산진성을 공격 하였다. 15일은 동래성을 유린하였고, 양산, 밀양을 거쳐 청도, 대구를 지나 선산과 상주를 공격하고 계속 북상 하였다.

13일 상륙을 마친 왜군들은 14일 부산진성을 침범, 동래성으로 밀어닥쳤을 때 적군이 남문 밖에 목패(木牌)를 세우고는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려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 하자 이때 송상현 부사는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고 목패에 글을 써서 항전 송상현은 15일 전투에서 두시간만에 중과부주적으로 전사, 왜장 히라요시(平義智) 이다.  


 열나흘 날 한낮이 되어 동래로 쳐들어와서 동래성 밖 조련장에 진을 쳤다.

고니시의 모사인 중 겐소와 왜장 다이라노 시게노부는 팻말을 아래와 같이 써서 동래성으로
던져 넣었다.

戰則戰 不戰刞 假我道
(싸울 테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거든 우리에게 길을 빌려주도록 하라.)

당시 동래부사 송상현은 ...
戰死易假道難
(죽기는 쉬운 일이나 길을 발리기는 어렵다. )
라고 응답하며 군관민 2000여명과 맞섰다.

황급히 달려온 을산 군수 이인함, 양산군수 조영규. 울산병영의 경상좌병사 이각...
기세당당한 왜군에 이인함은 도망하다 왜군에제 잡히고, 실질적 방어책임자인
이각은 동래성 뒤 소산으로 후퇴해 있다가 애첩을 말에 태우고 도망갔다.
수영에 본영을 둔 경상좌수사 박홍은 이미 수영 동래를 거쳐 밀양으로 도주한 뒤 였다.

중과부적인 동래성은 이렇게하여 불과 두시간만에 함락되고 만다.
송상현은 부채에다 아래와 같은 한시를 써서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마지막 하직인사를
보냈다.

孤堿月暈 列鎭高枕 君臣義重 父子恩輕
(무리 진 달밤 외로운 성이온데,
느런히 벌려 있는 옆의 고을들.
꿈이 깊사와 잠이 한창이오다.
임금과 신하의 의리는 산같이 무겁고
부모와 자식의 온정은 너무나 가볍소이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열심히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전사하였다.  누구도 원한을 갚지 못했고, 출병한 방어사는 많으나, 승전한 이도 없고 돌아 온장군도 없다. 이러 한때 배설장군이 평의지의 주군 흑침구침의 목을 손수 베었으니,, 그리고 평의지를 쫒아 무계진까지 추격하였으나, 조정의 명으로 합천군수로 나아가게 됨은 너무도 않타갑운일이다.  송상현의 목을 벤 평의지의 목을 지척에 두고 합천군수로 떠나는 배설장군은 한탄했다고 한다.

 


의병장이 된 부친을 도와 용맹히 적진으로 나아가 부상진(扶桑鎭)전투에서 적장 흑전구침(黑田句沈:官兵衛)의 목을 베었으며, 개산진(開山鎭)에서는 적장 평의지(平義智)를 격파하는 전공을 세우고, 다시 무계진(茂溪陣)까지 출정하여 적을 평정하였다.

 

 성주성(부상진)전투 연구

김면은 만석지기 유생으로 임진란으로 쫄닥 망하게 되자 고령에서 봉기하여 의병도대장에 오른 인물이다. 그 아래 곽재우(좌장:의령)정인홍 (우장:합천) 기타 그의 대부분의병장들이 휘하에 있었고, 심지어 경상도 초유사 김성일(경상도관찰사) 그 아래에 있었으며 약1년간 맹활약을 하다 사망하였다. 김면이 당시 북으로진격 서울로 들어 갔더라면 도원수가 되었을 것이나, 김면과 곽재우 정인홍등은 시류를 읽지 못하여 싸나운 왜적을 추격하므로 힘든 일생 고단한 전투였었다.

 

1, 일본 중부군에 맞서 옥천의병장 조헌,영규(승병장/공주)등이 금산이치에서 새잡는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격멸하고자 진군하였으나 왜군에게패해 800여명이 전원이 전사하였다.(7백의총)

 

2,조헌을 지원하려고 출병한 고경명의병력도 합세하였다가 대패하여 고경명병력6.000여명이희생되었다. 금산 이치에서 6800명의 의병을 살육한 일본군들을 성주성 북쪽(부상현)을 합천군수의 1500병력으로 막으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이당시는 배설이 합천군수도 아니였음)

 

 

 

김면휘하 거의 모든 의병들이 참여 1~3차례 왜군 중부군 주력 육군 약 20.000명(가쓰라)에 대한 1~3차 공격이 모두 실패함, 성주성을 중심으로 개령 지례 개산진전투에 의병들은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중부주력군에 맞선 의병들은 그흔적도 없이 전멸했다. 성주성에서 맞닥뜨린 의병들을 대 살육이 저지된 것은 배설의 적장 수급을 벤 공로임에도 이는 인정도 받지 못했고, 패전의 책임은 배설이 떠 맡았든 것입니다.

 

성주성 3차 공격은 최대 규모의 의병 2만이 합세하여 공격하였으나, 모두실패했다. 1차 때는 일본군은 방어만 했으나,2차 3차에서는 일본군은 공격적으로 공격을 했다. 이 공격으로 의병들 전선이 무너져 패주하기 시작하였고,

 

일본군은 성을 나와 (왜장 흑전구침은 직접 말을 타고 추격) 일본도로 무자비한 살육을 개시하였다. 부상진까지 추격을 당한 의병들이 거의 몰살 직전이였었고, 이 때 배문덕 의병장이 부상진에 매복하고 있다가 일제히 반격을 개실했고, 때 마춰설이 단기 필마로 흑전구침향해 돌진 몆차례의 칼싸움 끝에 흑전구침의 목을 베어 아버지께(의병장) 바침,(배문덕이 적장의 수급을 취했다고도 알려져 있음,)

 

 

경상일대의 전투와 성주성 전투패배를 징비록은 배설 때문이라고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조헌 영규 고경명군대는 일본군의 상대라기 보다 일방적인 살육에 가깝다. 설령 배설이 합천군수라해도 기천의 관병으로 왜군을 막을 수도 없고,당시는 합천군수도 아니였다. 이정도 병력은 경상 우도 모든 관군이 합세해도 막기어려운게 당시 실정이였다.(배설은 이순신이 아니다)

 

성주성 전투의 탁월한 공로가 인정되어 1594년(선조 27) 초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임시로 머문 곳)에서 배설은 합천군수를 제수 받았다.당시 왜군들은 대장이 전사하면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 상식이 였었고, 계사년 1월 왜군들은 스스로 자진 철군을 해서 무혈입성을 했다. 성주성 전투는 실패했으나, 성주성은 탈환이 되었다. 왜군이 새를 잡는 조총을 들고 다닌다든 1593년 정월 명나라진영에 통보한 전국의 의병수는 22600명 장수는 약 200명 정도이나 실전에서 의병장들이 대거 사망하고 의병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어 명목만 유지하게 된다.

 

 

이 당시 광주 목사 권율의 군대 1500여명 화순 동북 현감 황진,편장 위대기,공시억의 군대 해남 군수 변응정, 나주 판관 이복남, 김제 군수 정담의 군대 전주 의병장 황박의 의병들이 전주성 탈환을 위해 북진하든 권율은 끝내 행주산성 파주까지 올라가서 도원수를 제수 받게 된다. 당시 배설은 배덕문장군휘하의 약 1500명의 의병중에 선봉장에 불과하였고, 김면과 정인홍은 약 1500여명의 향병인 배설에게 낙동강가로 가서 금산 이치등지에서 후퇴하는 일본군 약 1만병을 막으라는 명령을 했다.

 

이에 배설은 배덕문장군과 함께 약 1500여명의 향병들에게 의견을 묻자 대부분의견이 낙동강강변의 넓은 분지에서 적을 기다리자고 한다. 그러나 배설은 이미 추풍령전투와 탄금대 전투를 목격한 경험으로 병졸들에게 부상진 험로 계곡에 매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낙동강강변에서 아군의 군세를 믿다간 단 한명의 왜적도 공격치 못하고 몰살 당할 조총의 교대연발 사격을 걱정하여 부상현 계곡에 매복을 시킴으로써 화살 시위권으로 적을 유인코자 하였다.

 

 

드딛어 일본군은 의병들 전선이 무너지자 일제히 일본도를 들고 추격하여 부상진 계곡에까지 들어 왔다. 배설은 일제히 공격명령을 내리자 계곡에 갇힌 구로다 간베에 흑전구침은 배설과의 칼사움에 패배 목이 달아난자 일본군이 일제히 도주하여 성주성안으로 들어가 1월까지 침거하다 대장을 읽은 일본군들은 1월 밤에 모두 퇴각해 버렸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의 분기점이 되었고, 이전투로 경상도가회복되는 바. 권율은 이 전투덕분에 행주산성을 공격치 않고 일본군이 퇴각하게 됨으로 거의 공짜로 운좋게 도원수에 올랐다. 아무리 일본군이 멍청해도 주먹돌과 행주치마로 물러날 일본군이 아니였다. 일본군 수장 구로다 간베에가 사망하게 되어 철군했던 것이다.  

 

 

성주성은 대구 - 구미 - 선산 - 상주 - 문경- 조령 또는 대구 - 구미 - 금산(김천) - 추풍령을 잇는 일본군 주보급로를 지키는 요충이었기 때문에 이 성을 탈환하면 일본군의 보급에 막대한 차질을 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의병들이나 일본군들은 일전불사의 대군이 마주하고 있었다. 원래 성주성의 점령부대는 하시바 히데카쓰의 제 9군이었는데, 8월 11일자로 제 7군의 모리 테루모토 휘하 부장 가쓰라 모토쓰나 1만 병력과 교대하여 경상우도(右道)일대 일본군이 모두 집결하여 총 2만명이 넘었다.

 

김성일은 김면, 정인홍 등의 의병군이 성주를 공격하도록 하는 한편 도체찰사인 정철에게 병력 증원을 요청하여, 운봉과 구례의 관군 5천여 명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거기다가 화순에서 기병한 최경회와 임계영 의병군이 합세하여 관군의 지원군과 기존 병력을 합하자 총병력이 2만여 명에 육박했다. 당시 배설은 배덕문 의병장의 휘하에서 의병 신분이였다.

 

정인홍과 김면은 주둔지를 출발하여 합천에서 고령을 거쳐 성주성 남쪽으로 진출한 다음, 8월 22일부터 운제(雲梯), 비루(飛樓), 충차(衝車) 등 공성기구를 마련하여 대대적으로 성주성을 공격할 준비에 들어갔다. 개령에 있든 일본 모리의 증원군은 의병군의 측후방으로부터 공격을 시작하였고, 포위망을 미처 완성하기도 전에 기습을 받은 의병군은 곧 대열이 무너지고 대항도 제대로 하지 못찬 채 후퇴했다.

 

 

1차 공격에 실패한 정인홍, 김면 의병군은 한달쯤 뒤이 9월 11일 다시 제 2차 성주성 공략에 나섰다. 11일 아침부터 공성기구인 우네와 충차등을 준비하는 등 공격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부상현을 넘은 일본군의 증원이 의병군을 공격하였고, 이에 맞추어 성 안의 일본군도 성을 나와 협공하였다. 혼전 중에 정인홍으 별장 손승의가 조총에 맞아 전사하는 등 조선군은 또다시 패주하며 2차 공격도 실패로 끝났다.

 

3차 공격은 석달 뒤인 12월 7일부터 시작되었다. 1592년12월 김면은 경상 의병 도대장, 정인홍은 경상 의병장으로 임명되었다. 전라도 의병장 최경회, 임계영 의병군이 장수와 무주에서 각각 넘어와 개령과 고령 방면에서 활동하며 김면, 정인홍 의병군과 연락하며 일본군을 교란하였다. 12월 7일 성주성에 도착한 경상, 전라 의병 연합군은 8일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나,의병들의 피해가 너무 심해져 결국 14일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성과라면 배설의 적장의 목을 벤 것 뿐이였다.

 

 

3차례에 걸친 조선군의 끈질긴 공격을 받고도 무너지지 않튼 일본군은 왜장 흑전구침의 전사로 1593년 1월 15일 밤 성문을 열고 철수하여 개령의 본대와 합류하여 선산방면으로 철수하였다. 이에 조선 의병군은 성주성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이로써 경상우도, 낙동강 서쪽 지역이 모두 수복되었으며, 일본군은 부산 - 밀양 - 청도 - 대구 - 인동 - 선산 - 문경 - 조령 - 충주 - 용인 - 서울을 잇는 외길 육로 보급선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한편 성주성 공략의 선봉에 섰던 의병장 김면은 의병군을 일으킨 뒤 한 번도 갑옷을 벗은 일이 없이 큰 전투만 10여 차례등 대소 전투 40여 차례를 거듭하는 동안 만석꾼의 가산을 모두 탕진하여, 처자가 문전걸식을 하였는데도, 이를 돌보지 않고 전장에서만 보냈다. 하지만, 끝내는 전장의 과로로 병을 얻어 1593년 3월 11일 금릉군 하리의 한 병영 막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시에서 나라를 위해서만 싸우다 죽은 대장부의 어떤 회한 같은 것이 느껴진다.

 

김면은 슬슬히 只知有國 不知有身(지금까지 나라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 한 몸이 있는 줄은 몰랐네) 남기고 병영에서 전사했다.

 

배설이 김면 정인홍 아래에서 이름없는 의병신분이 였으나, 방어사의 부주(총무부장)로서 언제든지 합천군수로 제수 받을 자격이 있었음에도 패잔병 신세를 면치 못하다가 1594년 합천군수가 되고 경상우도 일대의 탈환 공로로 늦은 1594년 가을 진주목사(晉州牧使)에 제수되어 지역민들에게 덕을 베풀고 정사를 바르게 하고 온 고을을 내내 평안케하여 평판이 높았다. 그러다 1594년(선조 28) 왜적의 발호로 남해안 일대가 매우 소란하자 서애 유성룡선생은 공을 경상도 수군절도사로 천거한다.

 

배설은 진급이 아주 늦은 편이다. 그럼에도 경상지역 고관들은 배설장군의 전공에 시기하여 배덕문장군의 공이라며, 진급을 반대하는 상소가 많았으며, 자신들도 모르는 전공이라고 하기 까지 하였다. 자신들은 관군이 되어 도망다녔으니, 당연히 전공을 알 수 없었음에도 시기와 모함은 이때도 있었다. 배설장군이 획득한 구로다 요시타카가문의 장군도 두개중 하나가 아직도 종문에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유성룡과 권율은 역사를 왜곡의 종결자다. 일본군이 주먹돌이 무서워 도망갈 정도인데 전국토가 유린되나, 배설이 구로다 간베에 흑전의 목을 베어서 임진왜란은 종점을 향하고 일본군은 퇘각함에도 끝내 의병출신이라는 이유로 배설ㅇ의 공은 인정하지 못한다. 도망자로 만들고 훈장과 상패는  공무원 관료들이 챙긴 우리문화의 뿌리이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