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게시판

소매치기 절도범이 미국대통령 비서관이 된 사연

自公有花 2017. 9. 23. 11:48

소매치기 절도범이 미국대통령 비서관이 된 사연  (원제 ‘우물가의 소년’ 임종덕 이야기)

 

-6.25 전쟁고아가 미군 하우스보이에서 백악관 비서관이 되기까지의 실화-<‘안드레 명상’-김수호 발행- 2011년 6.8.10.12월호 기사>

임종덕씨의 월남전 비화는 미국 육군사관학교 교과서로 출판 되었고, 영화 'Deer Hunter'(디어 헌터)의 실화 주인공이다.

 

 

1. 중학생 때 북한군 손에 부모를 잃고

 

1949년 12세의 임종덕은 중국 용정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부모님과 함께 귀국하여 서울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1년 뒤 북한의 6.25 남침으로 고아가 된다. 임종덕 소년이 고아가 된 그날의 불행을 6.25전쟁 61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잘 알고 지내던 형님뻘 되는 청년이 임종덕에게 서울중학교 한쪽 교실에 불을 지르라고 했다. 당시 서울중학교는 인민군들이 주둔해 있었는데 이곳에 수감된 수십 명의 청년들이 훈련을 받고 곧 북한 의용군으로 전쟁에 나가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청년들을 탈출시키기 위해서 임종덕에게 불을 지르라는 지시를 한 것이다. 평소부터 의협심이 강했던 임종덕은 그 청년이 전해준 기름통을 들고 가서 교실옆 목조 건물에다 불을 지르고 북아현동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도망을 갔다.

 

집에 도착한 임종덕은 집안에 있던 큰 나무에 올라가 숨었다. 잠시 후 인민군 지프차가 집 앞에 서더니 요원들이 대문을 박차고 들어와 마침 마당에 있던 어린 여동생의 머리에 총검을 대고 부모님을 찾았다. 어린 여동생은 겁에 질려 와들와들 떨더니 지하 창고에 부모님이 있다고 말을 해 버렸다. 잠시 후 부모님이 양손을 뒤로 묶인 채 마당에 섰다. 인민군은 당신네들은 반동분자이기 때문에 인민재판에 의해 처형하겠다고 했다. 임종덕을 학교 방화범으로 체포하러 온 것은 아니었다. 형식적인 재판이 끝나자 총 소리와 함께 부모님은 쓰러졌다. 아버지 임성규는 독립운동가였고 어머니는 당시 숙명여고 교사였다. 인민군들은 미리 준비해온 장작 위에 시체를 얹어 놓고 기름을 부어 불을 질렀다.

 

2. 거지대장에서 소매치기가 되다.

 

이 무서운 만행을 나무 위에서 직접 목격했던 임종덕은 그 길로 서울을 탈출 피난민 대열에 끼어 정처없이 걷다가 다시 9.28 수복 때 미군을 만났다. 한 미군 대위는 임종덕을 친동생처럼 보살펴 주면서 데리고 다녔다. 그러나 원산과 흥남까지 임종덕을 데리고 간 그 미군 대위가 전사하면서부터 임종덕은 외로운 고아로 거지생활을 시작했다.

 

주로 서울역 앞에서 거지생활을 하던 임종덕 소년은 고아들을 데리고 당시 불광동에 있는 ‘희망원’으로 들어갔다. 그때 그의 나이는 열다섯 살이었다. 자신보다 어린 고아들을 동생처럼 보살폈다. 그러나 어느 날 고아원 원장의 놀랄만한 부정행위를 목격한 임종덕은 몽둥이를 들고 원장실로 쳐들어가 사무실을 박살냈다. 원장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산으로 도망쳤다. 임종덕을 보고 주위 형들이 너도 빨리 도망가라고 해서 고아원을 나와 서울역을 향해 달렸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니 동생뻘 되는 아이들이 “형, 오빠”하면서 뒤따라오고 있었다.

임종덕은 깜짝 놀라 돌맹이를 던지면서 따라오지 말고 고아원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내 혼자도 얻어먹기 힘든데 너희들을 어떻게 먹이고 또 잠은 어디서 잔단 말이냐”하면서 계속 저지했으나 아이들은 함께 손을 잡고 울며불며 임종덕을 따랐다. 남, 여 합해 29명이었다.

 

저녁때가 되어 서울역에 도착한 임종덕은 염천교 다리 밑에 임시 거처를 정하고 모두가 밥을

얻으러 나갔다. 두 시간 후에 얻어온 각종 음식을 다 모아서 비빔밥을 만들어 골고루 배식을 했다. 그러나 정작 임종덕은 자신이 먹을 음식이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잠잘 곳을 찾아서 임종덕은 행복했다. 큰 방공호로 만들어 놓은 장소를 깨끗이 청소를 하고 나니 그곳에 많은 아이들이 들어갈 수 있었다. 나이별로 남·녀 구분과 엄격한 규칙을 정했다. 임종덕은 어느 날 염천교 밑에서 당시 거지왕자로 소문난 김춘삼을 만나서 거지로써 살아가는데 지켜야할 중요한 규칙 몇 가지를 교육받았다.

 

1) 밥을 얻으러 갈 때 대문을 두드리지 말고 깡통 소리를 내라.

2) 밥을 얻을 때는 꼭 깡통이나 그릇을 준비해 가라.

3) 하루에 같은 집에 두 번 가지마라.

4) 땅에 떨어진 음식은 절대 먹지 말아라.

 

날이 갈수록 고아들이 계속 모여들어 129명이 되었다. 제대로 못 먹고 질병으로 그동안 24명이 죽었다. 어떤 날은 8명이 한꺼번에 죽는 날도 있었다. 약 사먹을 돈이 없기 때문에 심한 감기만 걸려도 고열로 쓰러져 죽어갔다. 그래서 임종덕은 중대한 결심을 했다. 그것은 바로 소매치기와 도둑질을 해서라도 약값을 모으는 것이다. 그 해가 1952년이었다. 매일매일 소매치기로 번 돈을 아이들의 옷과 약값에 충당했다. 임종덕은 서서히 간이 커지면서 소매치기에서 부잣집들의 담을 넘기 시작했다. 주로 서울 장충동이 활동 무대가 되었고, 특히 제니스 라듸오를 훔치는 날은 아이들에게 특식으로 꽈배기 빵을 한 보따리씩 사가지고 왔다.

 

3. 미공군사령관의 양아들이 되다.

 

어느 날, 임종덕 소년에게 그의 인생에 운명을 바꾸는 날이 왔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소매치기 대상으로 좀 고급스러운 손님을 찾고 있었는데, 미국 공군 장성이 탄 승용차 한 대가 미군 전용 주차장에 도착하는 것을 목격했다. 미군 헌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차에서 내린 장군은 환송 나온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며 잠시 담소를 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 임종덕은 승용차 뒤의 트렁크가 약간 열린 것을 발견하고 그 안에 있는 가방 하나를 훔쳐 비호처럼 도망갔다. 그러나 멀리 못가고 미군 헌병들에게 붙잡혔다.

 

임종덕은 과거 미군부대에 있을 때 배운 서투른 영어로 자신이 절도를 하지 않으면 자신이 데리고 있는 고아들이 굶어 죽는다고 말했다. 근처에서 임종덕을 유심히 보고 있던 장군은 곧 절도죄로 파출소로 연행 하려는 헌병에게 임종덕을 조선호텔 즉 장군의 숙소로 보내 하우스보이로 일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임종덕은 이 절호의 기회에 얻은 좋은 직업을 사양했다. 이유는 내가 없으면 100여명의 고아들이 당장 굶어죽는다고 했다. 장군은 헌병들에게 100여명 고아들의 생활 현장을 확인하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고아들 전원을 미국 공군이 운영하던 제주도 고아원으로 입소시키고 임종덕은 자신의 하우스보이로 일하게끔 명령했다. 그가 바로 미국 5공군 사령관 스티브 토마스 화이트 중장이었다.

 

당시 사령부는 일본에 있었지만 작전 지시 관계로 서울 조선호텔에 상주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전투비행기 조종사인 그의 외아들이 전투비행 중에 전사했다. 한편 화이트 장군은 임종덕을 데리고 약 1년 동안 유심히 관찰하더니 어느 날 임종덕에게 “너는 오늘부터 내 아들이 되었다”며 양자로 입적을 시키겠다고 했다. 모처럼 장군의 가슴에 푹 안긴 임종덕은 탱큐를 연발하며 엉엉 울었다. 임종덕은 다시 서울중학교 3학년에 복학하여 중단되었던 학업을 계속했다.

 

어느 날 임종덕은 사령관을 따라 수원의 미 공군기지로 갔다. 그는 이곳에서 좋은 친구를 만났다. 즉 같은 하우스 보이로 이곳 공군기지 막사에서 일을 하는 김장환(후일 한국기독교의 유명목사가 됨)이란 소년을 만났다. 김장환 소년은 임종덕을 아주 경계하는 눈초리로 “너는 도대체 누구냐. 너는 무엇 때문에 여기 왔느냐”며 매우 못 마땅한 표정으로 임종덕의 어깨를 툭툭쳤다. 그 이유는 자신이 일하는 이곳의 하우스보이 자리를 임종덕이 차지하려고 온 것으로 오해를 한 것이다. 그러나 잠시후 오해가 풀린 김장환은 임종덕에게 “너는 어떻게 장군의 하우스 보이가 되었느냐, 누구 빽이냐”며 너무나 궁금한 듯 계속 캐물었다.

 

임종덕은 하는 수 없이 자신의 과거와 특히 장군과의 인연이 된 사건까지 다 말해 주었다. 임종덕의 말을 다 듣고 난 김장환은 임종덕의 손목을 꼭 잡고 앞으로 좋은 친구가 되자며 격려를 해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하우스 보이가 된 사연을 간단하게 말했다. 김장환이 동네 아이들과 지게를 지고 산에 나무를 하러 가는 길에 당시 수원형무소근처에서 미군들의 야외 회식자리가 있었던 현장을 발견하고 거기에 갔다. 미군들이 먹다 남은 각종 음식이 많아서 김장환과 친구들은 포식을 했다. 음식을 다 먹고 나자 한 친구가 흙투성이가 된 미군 군화 몇 켤레를 보고 시장에 가져다 팔면 돈이 된다면서 가져가려했다. 그러나 김장환이 말렸다. “음식은 남은 것이니까 다 먹고 가도 되지만 군화를 갖고 가다 들키면 도둑으로 형무소에 간다.”면서 극구 말렸다. 김장환은 친구들이 떠난 후, 혼자서 흙투성이가 된 군화들을 전부 깨끗이 닦아 가지런히 놓아두고 일어섰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김장환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바로 미군이었다. 김장환은 이날의 인연으로 나무 지게꾼 소년이 하루아침에 수원의 미공군부대 하우스 보이가 된 것이다. 김장환은 임종덕과의 우정이 깊어질 즈음 미국으로 건너갔다. 하우스보이 제1호 출국이었다.

 

1953년 어느 주일날 임종덕은 양아버지 화이트 장군과 함께 당시 여의도 비행장에 있는 미군 교회를 찾았다. 미군들의 예배가 끝나자 바로 한국 공군 장병들의 예배가 시작되었다. 이날 예배석 제일 앞줄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김정열 국방장관, 김신 공군참모총장, 그리고 화이트 장군과 그 외 외국 고관들이 앉아 있았다. 임종덕 소년은 이날 이승만 대통령을 처음으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었다. 이 날의 설교를 맡은 한국 공군 군종감의 설교중 후반부의 설교가 임종덕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지금 이 나라에 만연한 부정부패를 척결하지 못하면 자유당의 정부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자유당의 총재인 대통령에서부터 국방장관 그리고 군종감의 직속상관인 공군참모총장까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새파란 20대의 청년 군종목사가 거침없이 설교를 해나갔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임종덕은 마음속으로 “저 목사님은 오늘 당장 형무소 가겠구나.”하고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예배가 끝나자 이승만 대통령은 강대상에서 내려온 군종목사를 덥석 안으면서 “아주 훌륭한 설교였소,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들이 목사님의 설교를 모두가 깊이 생각하고 각자의 소임을 성실히 해나가십시오”하면서 다시 군종목사의 손을 잡고 목사로서 애로사항을 말해보라고 했다. 그러자 목사는 공군초대 군종감으로서 가장 큰 애로사항은 교회가 없어 미군 교회를 빌려 쓰는데 하루빨리 우리공군도 자체 교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대통령은 앞으로 서울 대방동에 건설될 공군본부 건설 때 공군 교회부터 먼저 건축하라고 공군 참모총장에게 지시했다. 이날의 설교를 했던 공군 군종감이 지금(2011년) 미국 LA의 동양선교교회 원로 목사인 임동선 목사다.

 

4. 하바드에서 국제정치학 박사가 되다.

 

임종덕 소년은 서울중학교를 졸업한 후 양아버지의 권유로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미국행을 거절했다. 이유는 공산당에 의해 부모님이 처참하게 희생되었는데 자신은 군인이 되어 공산당을 타도하는 것이 목표라 했다. 양아버지는 앞으로 미국에 가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하면 다시 군대에 가서 군인이 될 수 있다고 임종덕을 설득했다. 양아버지가 미국 본토로 발령이 나서 곧 출국하는데 만일 따라가지 않으면 또다시 고아 신세가 되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1953년 12월 화이트 중장은 북미주 항공사령관으로 발령 받아 본국으로 귀환한다. 양아버지와 함께 미국에 도착한 임종덕은 아버지의 주선으로 오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풋싱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그는 학교 기숙사 생활에 만족하면서 하루 100개의 영어 단어를 외우기로 결심한다. 단어 100개를 못 외우는 날은 그날 저녁 식사를 굶으면서 밤을 세워가며 단어를 외었다.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임종덕은 하버드대학교에 무난히 입학하면서 그의 향학열은 더욱 불타올랐다.

 

1957년 하버드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다른 동료들은 모두 여행을 떠났지만 임종덕은 기숙사에서 방학 숙제와 리포터 작성에 여념이 없었다. 임종덕은 “앞으로 인류 역사와 문화의 중심은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테마로 <21세기는 중국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는 논문을 썼는데 이 논문이 하버드대학교 학생 잡지에 게제 되면서 미국의 언론과 정계에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닉슨 대통령의 외교안보 보좌관이었던 키신저는 임종덕의 논문에다 자기의 생각을 첨가해서 “중국이 앞으로 문화 중심이 될 수도 있다”고 썼는데 미국의 뉴스위크가 이 글을 크게 보도했다.

 

임종덕은 <2차대전 후 바이 아메리칸 정책이 아시아에 끼친 영향>이란 졸업 논문으로 하버드 대학교 국제관계 정치학 박사가 되었다. 이날 임종덕의 박사학위 수여식에 참석한 임종덕의 양부모는 감격을 억제하지 못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하고 있었다. 소매치기와 절도범으로 전락한 전쟁고아를 자신에게 맡겨 오늘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만들어 준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를 드린다고 했다. 특히 이 자리에는 화이트 장군과 가까운 동료 장성들이 대거 참석해서 자신의 아들처럼 임종덕을 껴안고 박사학위를 축하해 주었다. 하버드대학 개교 이래 그야말로 최고의 “별들의 잔치”가 된 날이었다.

 

5. 군 입대, 월남전 참전, 두 번의 포로생활

 

1967년 임종덕은 25살의 나이로 군 입대를 하고 4년간 장교 훈련을 받았다. 특히 낙하산 훈련과 특공대 훈련에서 1등으로 수료했다. 그의 첫 부임지는 주일 대사관 무관이었다. 미국 정부는 임종덕을 외교관으로 키울 계획이었지만 그는 6개월 만에 월남전에 지원하여 특수부대로 갔다. 임종덕의 임무는 미군 포로수용소를 습격해 미군들을 구출하는 작전수행이었다.

 

어느 날 임종덕 대위가 작전을 마치고 지프차로 귀대 중 매복 중인 베트공의 기습을 받아 전투가 벌어졌다. 숫자적으로 절대 불리함을 판단한 그는 즉시 부하 3명을 피신시키고 대신 자신이 포로가 된다. 임종덕은 먼저 포켓성경을 꺼내어 급히 손에 잡히는 데로 몇 장을 찢어 몸속에 감춘다음 성경을 풀 속에 던졌다. 이 포켓성경은 지난날 장교 훈련소에서 함께 지낸 동료가 준 선물이었다. 이때만 해도 임종덕은 확고한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그 동료는 임종덕을 항상 안타깝게 여기고 “너는 키도 작고 연약한 몸이니 앞으로 전쟁터에서 하나님이 너를 꼭 지켜 주실 것”이라면서 성경을 열심히 읽으라고 준 것이다. 임종덕은 그 친구의 강력한 권고 때문에 성경을 꼭 세 번 읽었다. 그때 비로써 성경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인이 되었다. 확고한 신앙을 심어준 그 동료는 지금 뉴욕에서 큰 회사 회장이 되었다.

 

앞서 말한 포로가 되기 직전 성경 몇 장을 찢어 간직한 것은 시편 1장~ 3장까지였는데 특히 3장의 내용이 임종덕에게 항상 위로와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임종덕은 수용소에서 “하나님은 왜 나를 포로가 되게 했느냐”고 짜증석인 기도를 자주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 속에 탈출이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그는 절박함 속에 간절한 기도가 끝나자 야음을 틈타 포로수용소를 무조건 탈출했다. 총탄이 빗발처럼 날아왔다. 단신의 체구에 단 한군데 부상도 없이 월맹군 부대지역을 벗어나 자신의 부대로 찾아왔다. 부대는 함성으로 뒤덮였다. 특히 월맹군 지역의 포로수용소 위치와 주요 부대의 배치 내용도 알고 왔다. 임종덕은 이때 국방성으로부터 정식 그린베레 대원으로 임명 받았다.

 

그의 활약은 주야간 없이 강행되었다. 적진의 주요 시설 파괴, 적군의 고위 지휘자 납치, 그리고 미군 포로구출이 임무였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두 번째 포로가 되었다. 첫 번 포로에서 탈출한지 3개월 만이었다. 임종덕은 이때 처음으로 하나님을 의심했다. 그러나 지난날 장교교육시절 룸메이트였던 그 친구의 말이 문득 생각이 났다.

“하나님은 너를 들어 쓰시려고 이런 고된 훈련을 시키니까 지금의 우리들 훈련을 잘 받아내야 앞으로 전쟁터에서 하나님은 분명히 너를 도와 줄 것이다”라는 그 말이 문득 생각나면서 큰 용기와 희망을 가졌다.

 

임종덕은 다시 탈출의 기회를 노리는데 어느 날 특별 심문을 받는 날이 왔다. 즉, 북한군 몇 사람이 임종덕을 유심히 보더니 “이 놈은 틀림없는 남조선 군인이다”면서 한국말로 심문하는데 임종덕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며 계속 영어를 사용했다. 자신은 중국계 미국인이라고 강력하게 말했다. 그러자 북한군은 야구방망이 같은 몽둥이로 임종덕을 엎드려놓고 그야말로 개 패듯이 내리쳤다. 임종덕은 기절 직전까지 갔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임종덕의 입에서 “아이구 죽겠네! 아이구!” 소리가 단 한마디만 튀어나오면 한국군으로 인정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임종덕은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신음 속에도 “오마이갓” 소리만 계속했다. 북한군은 자기들끼리 “이놈은 진짜 남조선 놈은 아닌 것 같네” 하며 수용소를 나갔다.

 

6. 영화 ‘디어 헌터’의 주인공이 되다.

 

그 후 임종덕은 월맹의 최북단의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이곳은 당시 소련, 중국, 북한으로 쉽게 보낼 수 있는 포로들의 집합소였다. 그런데 이 수용소에서 임종덕은 기막힌 경험을 했다. 어느 날 임종덕은 수용소 사무실로 불려나갔다. 월맹군 장교 4명과 경호원1명이 각자 권총을 차고 있었는데, 임종덕이 보는 앞에서 소련제 권총에 실탄 1발만 장전해서 임종덕에게 건네는 것이다. 6발이 장전되는 탄창에 1발만 넣고 리볼버를 몇 바퀴 돌렸다. 그리고 이 권총을 임종덕에게 주면서 자신의 머리에다 데고 발사하라는 것이다.

 

권총 방아쇠를 당길 때 탄창칸에 실탄이 없으면 사는 것이고 있으면 즉사한다. 생존 확률은 1/6이다. 임종덕의 목숨에 돈을 걸고 『러시안룰렛』 놀음판을 벌인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절체절명의 순간에는 신을 찾을 수밖에 없다. 임종덕은 이 순간 하나님께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를 했다.

“하나님 저가 지금 이 악독한 무리들에게 제 생명을 빼앗긴다는 것은 너무나 억울합니다.”

드디어 경호원의 명령대로 임종덕은 자신의 머리에 권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다행히 총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러자 이긴 팀의 군인이 책상 위의 돈을 자신의 포켓에 쓸어 넣었다.

 

수용소의 고위 관리자들은 하루하루 일과가 너무나 지루하니까 매일 『러시안룰렛』 놀음판을 벌이는데 어떤 날 권총 소리가 나면 죽은 자의 시체는 바로 옆 강에 던지고 악어의 먹이가 된다. 이 절박한 상황을 이기고 살아남을 방도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자나 깨나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에 매달렸다. 그리고 탈출계획을 세웠다. 다시 『러시안룰렛』 놀음판에 불려 나가면 지난번과 같은 상황에서 4초안에 그들을 처치하고 도망칠 계획이다. 4초란 1초에 한 명씩 처단하고 100미터 떨어진 메콩강에 뛰어드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1주일에 한 번씩 놀음판에 불려가는 순서가 임종덕에게는 한 달이 되어도 부르지 않는다. 임종덕은 오히려 초조해졌다. 곧 북한이나 중국으로 끌려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임종덕은 ‘4초 탈출’ 작전계획을 세우고 은밀하게 이미지 트레이닝과 운동연습 흉내를 내며 한 달간 탈출훈련을 계속했다. 후일 임종덕은 “그때 한 달간 그들이 나를 부르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탈출을 완벽하게 성공시키려 훈련시킨 기간이었다.”고 술회했다.

 

드디어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임종덕은 그들에게 불려 나갔다. 권총 찬 4명이 서로 둘씩 마주보고 앉았다. 이날따라 여자 경호원은 소총을 옆에 세워놓고 서 있었다. 임종덕은 경호원 옆에서 떨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하나님! 한 달 동안 훈련시키신 ‘4초 탈출’의 승패가 지금 하나님 손에 달렸습니다. 꼭 탄환이 첫 번째 리볼버에 장전되게 해주세요. 한명이라도 사살하게요”

 

이윽고 장교 1명이 리볼버에 탄환 한 발을 넣고 드르륵 돌린 후 임종덕에게 건넸다. 권총을 건네받은 임종덕은 순간 담대해졌다. 불안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준다는 확신이 생겼다. 믿음대로 한 달간 연습한 ‘4초 탈출‘작전을 개시했다. 권총을 자신의 머리에 대는 척 하다가 가장 경계하는 적에게 방아쇠를 당겼다. 총소리와 함께 한 명이 꼬꾸라지자 나머지 3명이 권총을 꺼내기 전에 평소 익혔던 그린베레의 무술로 상대방을 4초 만에 격파하고 전광석화같이 강을 향해 뛰었다. 강물로 뛰어든 임종덕은 지난날 특수전 훈련 때 배운대로 그 위치에서 10분 동안 있었다. 뒤늦게 달려온 월맹군들은 헤엄쳐 도망 간줄 짐작하고 멀리 2백 미터 쯤 떨어진 곳에 사격을 가하고 있었다.

 

7. 기적의 탈출

 

. 기적의 탈출

 

매콩강 지류에는 악어와 5미터 이상 되는 물뱀이 많이 서식하는 지역이다. 강물을 헤엄쳐 떠내려가면서 하나님께 계속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저 악어들과 물뱀들의 눈을 가려서 나를 보지 못하게 하옵소서” 계속 기도만 했다. 월맹군 주둔 지역을 벗어난 임종덕은 드디어 밀림 속으로 숨어들었다. 매일 같이 왕개구리를 잡아먹었고 어떤 날은 4미터 이상 되는 뱀을 잡아 껍질을 벗기고 나무 위에 말리며 1주일간 먹었다.

 

가끔씩 멀리서 들려오는 비행기 소리를 듣고 그쪽이 남쪽이라 판단하고 계속 밀림 속을 걸었다. 어느 날 미군 헬리곱터 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려왔을 때 그는 자신을 알리기 위해 강가의 백사장으로 뛰어나가 헬기를 향해 미친 듯이 펄쩍펄쩍 뛰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헬기는 임종덕을 발견했지만 베트콩의 검은 옷을 걸친 그를 베트콩인줄 알고 기관총 사격을 퍼부었다.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총탄을 피하며 단 한군데도 다친데 없이 밀림 속에 또 숨었다. 엄청난 절망감으로 쓰러져 누워있는데 다시 그 헬리콥터 소리가 들려왔다.

 

임종덕은 그 순간 “하나님! 제 영혼을 당신께 맡깁니다!” 큰소리로 부르짖으며 무조건 백사장으로 뛰어나가 헬기를 향해 손을 흔들며 펄쩍펄쩍 뛰었다. 그 순간 미군 헬기 조종사는 중요한 판단을 내렸다. "저 키 작은 동양인은 베트콩의 군복을 입었지만 분명 패잔병으로 항복의사가 있구나. 그렇게 총을 쐈는데 다시 나타나다니". 그를 구출하려고 백사장에 비상 착륙을 감행했다. 헬리콥터에 실린 임종덕은 실신상태로 공군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병원에 도착한 임종덕은 의식이 회복되자 자신은 미국 그린베레임을 밝혔다. 심문하던 장교가 이 기쁜 소식을 부모님께 먼저 알리겠다고 연락처를 대라고 했다. 그는 미국 공군 참모총장이 자신의 아버지이니 연락을 취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수사관은 이상한 눈으로 처다 봤다. 임종덕은 즉시 메모지에다 공군참모총장 스티브 토마스 화이트 대장의 아들이라고 정확히 적어 주었다.

 

밀림 속에서 미군 헬리콥터에 극적으로 구출된 임종덕은 사이공의 공군병원으로 후송되어 즉시 공군참모총장 화이트 대장과 전화통화가 되었다. 화이트 대장은 포로가 되었던 아들이 탈출해서 사이공에 왔다는 육성을 듣고 “이게 혹시 꿈이 아니냐 아들아? 네가 포로로 잡혀간 그날부터 어미와 나는 밤낮으로 너를 위해 기도했단다."

당시 월남전에서 총 8명의 미군이 포로수용소 탈출에 성공했는데 그 중 임종덕 대위가 첫 번째다. 그래서 미군은 물론이며 미국 내 참전 가족들의 환성이 대단했다. 화이트 대장은 “아들아 내가 너를 직접 보아야 실감이 날 것 같구나! 그래 어디 부상당한 데는 없느냐”며 계속 울먹이며 질문을 했다. 그는 울먹이는 아버지를 오히려 위로하면서 항상 아버지가 한 말을 했다. “아버지께서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고 늘 얘기 했잖아요 ."

그는 1 주일 간 병원요양을 하면서 3개월간의 포로 생활과 특히 생사의 갈림길에서 자신의 생명을 끝까지 지켜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사이공에 도착한지 8일째 되는 날 임종덕 대위는 미국 백악관으로부터 긴급 통보를 받았다.

“존손 대통령께서 귀관을 백악관으로 초청하라는 명령이니 급히 오십시오”

이를 즉시 아버지께 알렸더니 그도 연락받았다며 나와 함께 백악관에 들어가니 너무 긴장하지 말라고 했다.

 

8. 은성 무공훈장과 영화 디어 헌터 (Deer Hunter)

임종덕은 거구의 존슨 대통령으로부터 은성무공 훈장을 받고 소령으로 특진했다. 특히 은성 무공훈장 수여는 부하 3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직접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훈장 수여가 끝나자 존슨 대통령은 임종덕을 신기한 표정으로 아래 위를 살피며 미소를 지었다. 164cm의 이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그 엄청난 행동과 지혜가 있었는지에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존슨 대통령은 공군 참모총장에게 “귀관은 어떻게 이런 자랑스럽고 훌륭한 아들을 두었소”하고 말했다. 대통령의 질문에 아버지가 답변을 못하자 임종덕은 “대통령 각하, 하나님은 항상 저와 함께 하십니다”라고 말했다. 존슨 대통령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임종덕의 굳건한 신앙에 큰 미소를 지었다.

 

한편 임종덕의 포로수용소 탈출 기자회견을 계기로 그가 겪었던 수용소 생활과 특히 『러시안룰렛』 즉, 권총 살인게임 등을 소재로 한 영화가 제작되었다. 마이클 치미노 감독 로버트 드니로 주연의 이 영화가 바로 『Deer Hunter』(디어 헌터 )였다. 당시 영화제작사로부터 기막힌 소재를 제공한 대가로 15만 불을 받았다. 또한 미국 육군사관학교는 임종덕의 수용소 탈출과 15일 간의 정글생활에서 살아나온 과정을 엮은 책 『정글 탈출기』를 만들어 육군사관학교 교과서로 사용하게 되었다.

 

 

9. 미국대통령 3대에 걸친 안보비서관

 

그는 은성무공훈장을 받은 5년 후 닉슨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두 번째 백악관에 간다. 대통령 안보비서관으로 임명받고 키신저와 함께 외교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미국과 중국은 외교단절 상태였고 중국은 모택동의 문화혁명으로 외국의 어떤 문화도 침투할 틈이 없었다. 임종덕은 중국정부와 국민의 거부반응이 없는 스포츠외교를 생각고 미국 탁구선수단을 이끌고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등지로 순회하며 탁구를 통한 양국 외교를 서서히 펼쳐갔다. 이 핑퐁외교로 당시 중국총리 주은래는 임종덕비서관을 동생처럼 임종래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모택동을 다섯 번이나 만나도록 주선해 주었다.

 

1971년 미국과 중국은 극비리에 정상회담을 합의했다. 키신저는 일본에도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했다. 임비서관은 마땅히 한국에도 알려야 한다고 주장하자 키신저는 한국에는 당신이 가라고 했다. 처음 박정희대통령을 만났을 때 “일 하느라 결혼을 못했으니 중매는 내가서겠다.”고 해서 육영수 여사의 소개로 민씨 가문의 규수와 가정을 이루게 된다. 키신저의 중국 극비방문에서 합의된 대로 1972년 2월 닉선대통령이 중국을 공식 방문을 했다. 죽의 장막이 개방되던 1979년 미중 수교의 역사적 전환점을 이루기까지 뒤에서는 이런 외교노력이 있었다.

 

임비서관은 LA출장 중에 우연히 한국 출신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설교자 목사님을 어디서 본 기억이 났다. 20여 년 전 15살 때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예배를 드린 여의도 미군공군교회 임동선 목사였다. 그 후 임비서관과 임동선목사는 함께 한국 이민자들이 의지할 교회를 세우게 된다. 1970년에 창건한 ‘동양교회’다. 그 후 8천명이 모이는 대형 교회로 발전해 갔다.

 

임비서관은 닉슨, 포드, 카터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안보비서관직을 잘 수행했다. 카터대통령이 주한미군을 4, 5년 사이에 완전 철수하겠다고 했을 때 주한 미군사령부참모장 싱글러브소장이 철군반대를 주장했다. 이틀 뒤 5월19일, 카터대통령은 싱글러브장군을 소환하고 참모장 직에서 해임시켰다. 그는 이틀 후 임비서관을 불러 “한국이 당신의 조국이란 입장을 떠나서 나의 철군계획과 한반도 정책에 대해 말해보시오”라고 했다. 임비서관은 “현재 4만여 주한 미군이 있어 북한이 도발을 못하며, 한국은 경제부흥과 더불어 미국이 바라는 민주주의국가로 성장하고 있다”라고 답 했다.

또 카터가 국가안전보장 이사회에서 과거 월남전에서 도망친 도망병을 전부 사면하라는 지시를 했다. 아무도 말 못하고 있을 때 장군 진급심사를 두 달 앞 둔 임종덕은 싱글러브장군처럼

파면될 줄 알면서도 “전투 중에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친 자를 대통령께서 사면한다면 앞으로 전쟁터에서 누가 미국을 위해 생명을 바치겠냐”고 했다.

임비서관은 대통령의 걸림돌이 되기 싫어 1986년 육군대령으로 자진하여 예편했다.

 

임종덕씨가 서울에 올 때는 반드시 서울역 광장을 찾는다. 6.25 당시 밥을 얻어먹지 못해 물배를 채우려고 종로구 내자동 우물가에 누워있을 때, 6.25종군 타임스 기자가 허기에 지친 임종덕소년 사진을 찍어 ‘풀브라이트 종군기자상’을 수상한 ‘우물가의 소년’ 회상과 1974년 8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양아버지 화이트장군을 생각한다.

 

법이 없으면 정말 불편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법이 없어도 살아가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기업이나 중소기업들도 법이 없다고 사업을 못하는 게 아니며, 기업들도 항상 규제를 풀어 달라고 하는 데 그게 법 때문에 어렵다는 말이다. 공무원들도 모두 법에 따라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상식과 관습에 따라서 일하며, 감사를 받게 될 부분만 법에 따라서 자료를 맞추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이 없으면 시민들에게 피해가 갈 것처럼 이야기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로 법 때문에 망하고 피해를 보는 것이 대부분이다. 인간은 스스로 무엇인가 자위를 하는 거래를 갖기 때문에 법이 없다고 무법천지가 되지는 않는다.

 

 

경찰이나 판사 검사가 갖기 쉬운 생각이 법이 없으면 시민들은 살 수 없을 것이고 자신들이 있어 이 사회가 유지된다(Stero Type)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고대부터 범죄자에게 Stigma(오명=굴욕감=경멸)을 주기위해 인두로 V자를 새겨서 표시를 하고 워커하우스(노동수용소)에서 일하게 하면서 수용소에서 도망해서 구걸을 하면 누구나 잡아다가 노예로 사용하게(전과기록 제도의 유산)했었지만, 후대에 오면서 범죄자들의 노동력이 항상 무언가 결과가 나타나므로 V표시는 행운의 승리의 표시로 바뀌었다.

 

 

프로이드의 정신역동(Psychodynamic)결정론, "인간의 정신에 우연이란 없으며, 모든 생각, 정서, 행동에는 원인이 있다." 인간은 원초적으로 수동적인 존재이다. 범죄자 또는 범행이라고 해도 사회적인 책임이라고 생각된다. 북한(김정은)이 미사일 쏘고 핵무기 만들고 도발을 하는 것도 어떤 원인된 상황이 있어 그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나라의 병원에서는 가장 먼저 접수대에서 수납을 해야 하지만, 영국의 NHS(건강보험제도) 모든 국민이 병에 걸리거나 하면 병원에서 치료를 하게하고 귀가 할 때는 카운터에서 교통비를 지급해서 병원에서 치료한 환자가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있다. 임산부의 경우에서 치료는 공짜이고 교통비를 환불 받게 된다. 국가가 일자리를 보장(수입)의무, 1919 (Weimar 헌법 제 5장 151조) 생존권 조항이다.

 

 

일본인들이 가르쳐준 법전 상식을 원서라고 배껴 배운 우리들로서는 법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착각인 것이다. 영국이나 미국은 법이 없어도 전혀 지장이 없이 사법제도가 유지되고 전 세계를 지도하고 있다.

 

 

 

 

2017.9.16

 

여러번 시위를 하고 의사표시를 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소용 없는 것이 시위와 데모입니다.

 

우리나라는 정형화된 일제식지배 법령인 조선총독부령을 근본

모태로한 법치 국가입니다. 이런 사법제도는 미국이나 일본에는 그 원형을 찾을 수 없습니다.

 

 

법이 바뀌기 전에는 누구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법이 어떤 사람들을 예산으로 대폭 지원하게 하기도 하고 망하게 하기도 합니다. 롯데가 중국에 장사하러 들어 가서 정지맞은 것이 바로 중국의 법때문이죠, 미국이나 영국 아프리카하고 장사를 해도 법이 필요한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모든 범죄와 악행의 원인은 자유를 통제한데서 창조적 잠재력을 억제한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즉, 범죄는 자유를 억압하기 때문에 생성되

는 것이다."(공부해 정의일류국가 160p)


활동하는 시민, “열 중 7~8명이 전과자” / 69

국민을 위한 정의로운 사법제도가 되기를 / 75
사법권회수와 민주국가 재창조 / 77

당사자가 불신하는 사법제도 / 85
조선식민제도 사법성역화 VS 사법민주화 / 87



"검찰은 국회의원이나 시민 정치인들을 기소독점으로 누명을 씌워 기소
할 수 있다. 법원은 헌법 제 103조의 양심에 따라 유죄나 무죄를 선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누명을 씌우든 어쨌든 시민들이나 정치인들이 검찰과 법원
과 다투어 승리할 수단이 실제로 거의 없다."

(출처:공부해 정의일류국가67p)

(주)유비쿼터출판 큰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