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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 나 법, 식민지 유산과 아베의 공격

自公有花 2019. 7. 29. 20:00

나야 나 법, 식민지 유산과 아베의 공격

한국과 일본은 자유국가 이념에서는 동일하지만 정치와 법률은 상이하다. 그 이유로는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지배 당시 제도와 법률을 계승한 나라이고 일본은 미국에 의해 제도가 바뀐 나라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제도는 지구상에 그 원형을 찾기 힘든 일본 식민지지배의 수단인 검찰권을 통해서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진 정치제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삼성의 법무 팀도 법리검토나 법률을 잘 외우는 법률가출신이 아니라 전직 고관 출신을 영입하여 꾸려나가고 있다.

 

법원에서 검찰에서 전관 변호사들은 재판정에서나 그 밖에서나 나야 나라고 하면 모든 재판과 행정이 술술 풀리는 구조인 것이다. 다른 회사의 유명한 변호가가 나와 봤자, 왜들 그래? 검찰총장 출신 변호사가 나야 나라고 하면 선배님 알았습니다. 하고 해결되는 것이다.

 

식민지 지배법률이 그렇듯이 원리 원칙이 본래 없는데다가 전 세계에 전례도 없고 일본기업이 미국 기업이던 마음대로 피고로 두드릴 수 있다는 것을 이용하는 것이다.

 

검사출신들이 칼을 갈겠다고 하면 그 칼은 바로 나야 나칼인 것이다. 이런 인물이 수 백명씩 모여 있는 법무 팀은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사업을 추진할 수 있다. 이런 무시무시한 칼도 동네 양아치, 불량배, 나쁜 놈들 치는데 사용된다면 나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기대와는 항상 다르게 정적제거나 정치보복에 사용된다는 점이다.

 

한국의 정치인들이 WTO 제소하겠다고 벼르고 있지만, 일본이 자국에 미래에 대한 불안 생존을 위한 보복을 재판을 통해서 해결하겠다는 것은 전쟁을 일으킨 침략군에게 재판걸어서 판결 얻어 내겠다는 생각이다. 일본이 넘겨준 식민지배 법제도 무소불위 사법제도를 항상 이용한 사람들 머릿속에는 당연한 결론이다.

 

WTO 판결 나려면 2~3년 걸리고 일본이 국가적으로 대항하면 5년은 기다려야 한다. 당장 삼성 반도체가 조업을 중단해야 한다느니 하는데 신선놀음하고 있는 셈이다. 당장 기업들 2~3개월을 어떻게 버티냐가 문제인데 정부 관료들은 배운대로 법대로 하자고 그러고 단임제 대통령제에서 누가 책임질 사람이 없다.

 

총리가 대통령을 꿈꾼다고 하기도 해서 그러면 2인자 자격으로 일본으로 가서 책임지고 협상을 해야 하는데, 소문과는 달리 제 2인자도 아니고 대통령 꿈도 사실이 아니었다는 게 나타나고 책임질 사람이 없다.

 

정부 관료들 생각대로 판검사 국가 답게 판사들 견해대로 3년 후에 WTO 판결로 승소해봐야 아무 쓸짝에 없고 이미 기업들 다 망하고 나면 소잃고 외양간 쳐다보는 격이될 것이다.

 

식민지지배 지배 시절 법률과 제도를 가지고 정치제도만 미국식으로 차용해왔기에 대통령이 되면 식민지지배 시스템을 총괄 하는 검찰권(판사)으로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지게 된다. , 일본 천황이 만들어준 나야 나 법인 지배수단과 제도를 가지고 불가능한 것이 없다.

 

일본은 내각제 총리로서 의회를 통해 선출되어 파벌위주의 중론을 따라 정치를 하는 구조로 힘이 약하고 의회나 이익단체 관료기관에 의해 견제가 많다. 일본민의를 벗어난 일을 추진할 수 없는 구조에 있다.



 

한국과 일본의 경제력,

일본 약5조 달러 한국 1.62조 달러로 작년 기준 일본이 한국에 세배정도의 국력이 있다. 한일 국교 수립 전인 1950~70년 일본의 하층민인 공원 농민들이 기생관광으로 접대를 받으러 왔었으나 한일협정으로 포항제철이 건설되면서 한국은 빠른 고도성장으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여 한국은 일본에 필적할 만큼 경제 규모를 키우게 되고 일본이 실로 위협을 느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생관광으로 엔화를 구걸하던 나라가 어느 순간 미국의 지원을 통해 일본의 경쟁상대로 몸집을 키워 30배의 국력차를 3배의 국력차이로 좁힌 것이다.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한국의 경제 성장을 부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질투와 혐한론이 속내에 내재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한국의 보수 정권에서는 한일 관계에서 일본을 무시하거나 한 경우가 없었으나, 새로 들어선 정권에서 한국의 국력이 성장한 만큼 기존과는 다른 한일정책 기조인 중국과 러시아 북한과 연대하는 경제적 대결을 추진함에 따라 일본으로서는 동북아에서 고립되는 결과를 낳았다.


 

중국 러시아 북한의 세력을 호가호위로 확보한 한국의 진보정치인들이 무소불위의 대통령제를 이용하여 사법부 대법원이 과거와는 다른 목소리 인 정신대 징병문제 등을 이유로 일본 기업을 공격당할 것이라는 우려로 일본은 한국을 장래 적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하여금 수출 금수조치를 결행하게 만들었다.

 

일본 아베 내각은 떠오르는 중국과 러시아 핵을 보유한 북한과 연대하는 경제력이 급성장한 한국과 미래 동북아 패권을 놓고 벌일 경쟁을 고려할 때 미국과 동맹관계를 이용해서 미리 한국을 주저앉게 전략적으로 금수조치를 해야 한다는데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아베가 일본의 미래를 위해 전략적으로 선방을 날린 상태이다. 아베 아니라 일본의 그 누가 지도자라 해도 일본의 이익을 위해서 이 정도에 한국의 기를 꺽지 못한다면 일본은 한국에 당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정치 행위로 나타났다.




 

한국은 이참에 일본과 대결해서 승부를 보자는 여론이 비등해진 것만 보더라도 예전의 한국이 아니라는 점은 한 국민 모두가 자성하고 있다. 그렇다고 정치인들이 국민 여론을 볼모로 경제적 대결로 몰고 가거나 한일 대결을 일본 의도대로 끌고 간다거나 중국과 러시아와 연대해서 대항 한다면 미국으로부터 불신을 받게 되어 일본의 의도에 걸려들게 되고 마는 것이다.

 

지금 한국으로서는 일본의 아베가 주도하는 한일 대결이 양국에 평화를 해치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한국이 일본과는 뗄 수 없는 동맹관계임을 주장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 국민들이 아베를 겁쟁이로 평가하게 한일관계는 동맹이고 공연한 우려라는 것을 인식시켜야 할 것이다. 아베와 일본국민을 분리시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일본과 한국이 제2의 한일협정이라고도 할 수 있을 동맹관계를 회복시키고 양국의 번영을 통해서 양국 국민들에게 평화와 경제적 이익을 제공하겠다는 큰 그림을 그려서 설득해야 할 것이다. 일본 정치인들의 승낙을 얻으려 하지 말고 일본국민들을 이해시키는 특별한 정부의 대책이 나와야 한다.

 

 

아베 총리 그는 누구인가?

 



 

아베총리 부친은 타계한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 전 일본 외상(1991) 할아버지는 아베 간(安倍寬·18941946)이다.

아베 간은 1937년 야마구치 현 오쓰(大津)군에서 무소속으로 의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는 마이니치신문 기자출신으로 1951년 노부스케 장녀와 결혼했다.

아베 간과 노부스케는 같은 고향의 친구 사이로 노부스케가 외상이 되자 신타로는 기자직을 그만두고 비서관으로 합류하여 장인이 총리가 되자 총리비서관이 되었다가 1958년 총선에 출마했다.

 

세계 2차 대전에서 가미카제 특공대로 출격하기 전에 전쟁이 종전하여 목숨을 건진 후 평화주의자로 바뀌었다고도 한다.

    



 

아베 신조 총리는 신타로의 차남으로 19549월 오쓰현에서 태어났다. 장남 아베 히로노부는 미쓰비시 상사 패키징 사장으로 일본 재계의 주요 인물중 하나이다. 삼성과 현대를 지원해온 미쓰비시 그룹은 강제징용 손해배상 청구 소송으로 한국 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피고 회사이다.




 

아베 신조 총리는 친가가 아닌 외가의 계보를 따랐으며 기시 노부스케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정치적인 감각이 매우 탁월하고 이번 한국 때리기로 일본인들의 불안을 크게 부풀리고 있어보인다.

 

아베의 외가 외할아버지 기시 전 총리는 야마구치 현청의 직원이던 사토 히데스케의 차남으로 노부스케 가문은 기시 가문의 대를 있기 위해 성을 바꾼 것으로 일본에서는 흔한 가족개념이라고도 한다. 노부스케의 친동생은 비핵 3원칙을 마련한 공로로 197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사토 에이사쿠 전 총리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거북선 식당에서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12척의 배로 조선을 지켜낸 역사적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위기극복에 힘을 모아줄 것을 당부했다'12척의 거북선을 만들었고 구해 냈던 주인공이 바로 배설 장군으로 조선의 왕으로 책봉된 하시바 히데카츠를 물리쳐 임진왜란을 종결하였었다.

   

 

한 일 역사에서 얻는 독립의 교훈,

 

대원군과 고종 민비 왕후는 배설 장군 원한을 풀어주었으며 역사에서 배설 장군이 임진왜란 1등 공신 임은 역사에서 이미 정리 된 사항이다.  그럼에도 국민은 알지 못하고 식민지 지배의 일본의 왜곡된 교육이 혼돈을 주고 있다.




 

첫째 : 임진왜란이 320년 이 지난 시점 고종과 민비 왕후는 1873년 종묘에서 배설 병조판서 가중하는 해원식의 제사를 올렸고 유림에게 반포했다. 배설 장군은 1873(고종 10)에 다시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가중했다. 금오산 수송중공비를 세우면서 배설 장군의 억울함은 만 천하에 풀어준 것이다.


둘째 : 그 뿐만이 아니라  선조는 재임 중 1605. 4 배설장군을 선무 원종 1등 공신에 책록함으로서 역사에서 모반이라는 죄과에 대해서는 허위임을 입증하였다. 임란 1등 공신으로 책록됨으로 이순신 권율에게 조금도 모자라거나 부족함이 없이 복권되었다, 그것도  임란 6년 만에 재심이 신속히 이루어진 것만 봐도 장군에 희생이 모함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셋째 :  도망다니던 선조와는 달리 임란시 분조를 이끌었던 전쟁을 누구보다도 잘이해하는 광해군이 집정 2년만인 1610년 배설 장군 임란 공적을 들어 가선 대부 호조참판(광해군)과 자헌대부 병조판서(고종)로 증직시키고 녹봉을 하사함으로서 조선조정은 역모에 대한 단죄가 잘못 되었음을 조선 천지에 확인한 것이다. 


유성룡 권율 이순신의 특별한 관계에서 10계급을 벼락 출세한 이순신 장군과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간 조선에서 경상도서 의병을 읽으켜 함경도까지 진출한 왜놈들의 보급로를 끝어 내고  경상도를 탈환하고 진주성 전투를 이끌며 적치를 수복한 배설 장군을 도망만 다니고 적에 부스러기나 쳐부순 장군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잘 못인 것이다.

해전을 비교해도 부산 앞 바다에서 조선수군을 이끌면서 일본군 15만명을 바다에 묶어 놓고 일본의 주력군과 전투를 벌인 유일한 조선에 장군에 대해 일본의 컴플랙스는 너무도 집요했었다.  


단순한 비교에서도 세번에 걸쳐 복권이 단행된 배설 장군은 당시 장지의 규모도 조선의 모든 장수들이 받은 땅보다 많은 약 6600만평방을 하사 받은 사실로서 임진왜란의 절대적인 공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역사에서 세번에 걸쳐 재심되고 복권되었으며 그의 아들 비문을 영의증이 손수 쓴 기록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식민지 교육으로 억울한 모함을 받고 있다.



 

일본의 보복  1894723일 아베의 고조부 오오시마 요시마사는 배설 장군을 복권하고 독립을 염원하는데  분노해서 일본군을 몰고 경복궁을 급습 고종을 포로로 잡은 기해외란 사건이 일어났다  

 

 

끝내 1904718일은 영국인 배설과 양기탁이 대한의 독립을 기원하며 대한매일신보를 창간 했다. 당시 고종은 선조들의 역사를 반추하면서 귀화한 영국인의 대한 독립 투쟁에 감명받아서 은혜에 합당 한 조선식 이름을 "배설"이라고 지어주고 배씨의 성을 사성 하였었다.



                    영국 신문에 실린 배설과 양기탁,

 

고종은 장렬히 전사는 했지만 나라를 구하지는 못 한 장수는 하나하나 제외했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에서 적치(경상도)를 탈환한 유일한 장수인 배설과 아버지를 거론하며 해원식을 열어 배설의 충절을 내세웠다.

 

영국 귀화인에게 조선 사람 중 가장 애국심이 드높았던 장수 배설을 추켜세운 대원군과 고종의 결정은 배설로 결정되었다.

 

 

배설을 작명한 고종과 민비 황후는 궁전의 곤녕전과 복도로 딸린 옥호루에서 오카모토 등이 황제의 용포를 잡아 제지하다 용포가 찢어지자 어께를 눌러 앉혀 위협을 하고 순종 태자가 호통치자 상투를 잡아 벽에 내동댕이치고 칼등으로 목을 후려처 기절시키는데 후일 순종이 승하할 정도의 부상을 입었다.


 

일본 낭인들은 궁녀들을 하나하나 폭행하며 옷을 모두 벗기고 애기를 낳은 여부를 국부 검사를 해서 황후냐고 일일이 심문하여 의심 가는 상궁 몇 명의 가슴을 칼로 베고 난간 밖으로 던져 버렸다.

이에 러시아 미국 청나라가 항의하자 일본은 민비 왕후시해사건의 주범인 미우라 공사 외 48명을 히로시마 감옥에 잠시 구치한 후 검찰이 조사하여 살인죄의 범죄혐의가 '증거불충분'으로 모두 석방 돼었었다.

 

대원군과 고종이 계속 왕위를 지켰었더라면 배설은 만고의 충신 임진왜란을 종결한 구국의 명장으로 복권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베의 할아버지에 의해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만고의 충신이라던 배설은 일본에 식민지지배 하에서 배설은 다시 한 번 식민사학자들의 손에 만고의 역적으로 낙인찍히고 백과사전에 등재되었으며 지금도 누명은 더 씌여지고 있다.

 

금오산 정상에는 선조 병신(宣祖 丙申):조선시대 선조 임금때 병신년(1596) 선산부사 배설(善山府使 裵楔):그 때는 구미를 "선산부"라고 불렀고, 부의 최고 높은 사람을 "부사""배설"이란 사람 이름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금오산성 천 구정칠택(築 金烏城 穿 九井七澤) 금석문 비, 암각에 금오산성중수송공비(金烏山城重修頌功碑), 금오동천(金烏洞天), 배설(善山府使)의 산성수축기념석각(山城修築紀念石刻)금오산성은 외적의 침입에 대적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수축되었던 산성으로 대원군이 중건한 비문이 남아 있다.

 

 

 

일제시대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와 오카기키 테츠로(일본어: 岡崎哲郎おかざきてつろう) 경북도지사 가 대혜 폭포를 방문하여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서 그 즉시 석공들과 일본스님들을 불러 바위에 명금폭이라고 새기게 했다. "명금폭" 금오산에 토요토미의 눈물이 떨어진다는 임진왜란의 실패를 되세기는 명금폭포가 있다.




 

역사에서 친일파들이 정권을 잡고 식민지 지배가 되면서 배설은 역적으로 나라를 팔아먹은 졸장으로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고종 황제가 머나먼 이국인 영국인에게 배설장군처럼 일본을 괴멸시키고 독립을 쟁취하게 해달라고 염원 했었기에 그때부터 일본 총독은 영국인 배델은 감옥에 가두고 죽이고 말았다. 배설은 임진왜란을 승리로 만들었지만 영국인 배설은 감옥의 고난으로 이국 만리 조선에서 죽고 말았다.

 

아베의 할아버지 오오시마는 영국인 임시 배설 기자를 죽이고도 한이 덜 풀려 배설의 비석은 그라인더로 갈아 먼지로 만들었다, 고종이 영국인에게 이순신 장군이라고 이름을 내렸더라면 일본인들이 놀라서 도망가고 그는 그렇게 모진 고문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항일 투쟁이 들불처럼 읽어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럽지만, 항상 그러한 시위에 끝에 국권이 침탈 당하고 충신과 역적이 뒤바뀐 것을 교훈으로 삼아서 일본을 넘어설 계책과 행동이 요구되는 것이지, 죽창이나 들고 만세나 부를 때는 아니라는 것을 똑바로 직시 해야 한다.

 

일본이 두려워하는 우리 미래를 지켜 내려면 일본에 대한 항일 투쟁이나 테러 불매운동으로는 부족하다. 진정코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바란다면 우리가 물려 받은 일본 식민지 유습을 과감히 청산하고 미국의 동맹으로서 미국과 다투는 미래를 그려야 할 것이다.

 

나야 나의 제도를 과학적이고 선진적으로 개혁해서 국민에 생활의 질을 향상하고 모든 국민이 기업을 스스로 자율로 할 수 있도록 자유를 확충해야 할 때 인 것이다.

 

일본이 던진 공격에 칼날을 잡을 것이 아니라, 일본이 따라 올수 없는 미국과 경쟁할 사법제도와 법률 시스템으로 민족이 스스로 일해서 일어나고 다시 태어나야 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아베 총리는 한국에 대해서 전대에서부터 잘 알고 있고 한국인들의 습성이나 상식 사상에 대해서 나름 할아버지로부터 영향 받은 역사인식이 내재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이제 과거의 한국이나 북한과 같은 중국 러시아권의 폐쇄적인 국가가 아님을 아베 총리는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은 미국과 강력한 동맹을 기치로 식민지 유습인 제도와 법률을 버리고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 세계로 뻗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반일 불매운동에 빠져있다, 한미 동맹을 이간해서 일본의 미래를 보장받고자 하고 있는 아베의 책략에 이용되고 있는 엄중한 현실을 바라봐야 한다.






2019년 7월 29일 배영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