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진주성 전투(출처:명왜진)
1592년4월13일 부산을 점령한 일본군침략을 막고자 조경의 군대가 추풍령방어전에서 패배하자 추풍령을 근거지로 설(배설)은 추풍령 김천일대에서 향병을 모아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5월 3일 한양이 점령되고 왕이 북쪽으로 정처없이 몽진하므로 나라의 주인이 없는 외적치하의 혼란한 상태가 되었음에도 배설은 계속 저항했는데, (왜장이 묻기를 '김천 들녁에 밤 만되면 들판에 무수한 횃불이 보이는데 무엇이냐고 묻자, 설(배설)이 부하들을 훈련하고 부대를 만드는 것'이라고 첩자가 말해주니 왜장 모리 테루모토가 이미 나라가 없어졌는데 무슨 부대가 필요하냐고 웃었다는 것으로 모리 테루모토는 침략군중에 가장 대규모의 부대를 파견하고 일본군 측에 가장 높은 장수 임에도 왜란 이후 모든 영지를 몰수 당하고 평민으로 강등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패잔병들이 몰려 들어 7월에는 기병 약 1500명의 부대가 적치하(성주)에서 저항 수위를 높여 나가는 중에 7월 7일 하시바 히데카츠(구로다 요시타카)일행이 한양행차 중에 수차례의 접전을 벌여 부상진에서 구로다 요시타카의 하도1점을 빼았으며 구로다 구침을 척살하고 그 수급을 베고 하시바 히데카츠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중상을 입혔고, (약 20여명의 왜장을 척살했다는 주장으로 일본군 병사들도 200여명 이상 전사하였다)
하시바 히데카츠가 서울행을 포기하고 남으로 퇴각하자 이를 추격하는 전투가 계속되었다.
배씨 종문이 보관하고 있는 세루 장군이 하시바 히데카츠(표주막 문양의 황금부채)를 빼앗고 갈비뼈 하나를 획득 하고,
구로다 요시타카의 (下刀)와 동생 구로다 분신을 척살하고 획득한 구로다 가문의 칼 두 점,
1차 진주성 전투(출처:명량 왜곡과 진실)
이에 구로다 요시타카는 서울로 쪽으로 가고 하시바 히데카츠는 남쪽으로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배설의부대가 계속 추격하자 구로다 요시타카는 서울에 도착하여 북상한 군대들을 '세루'를 추격하게 하는데 공식 기록에 9월 26일 북상한 일본군 선봉대를 남하시켜 의병을 소탕(배설을 추격)하게 하였다.
북진한 서울의 군대가 진주성까지 추격하고 김면(배설)의 군대가 부상한 하시바 히데카츠를 쫒는 과정에서 10월 3일경 창원부근에 이러른 가고시마 군대와 5일 경에는 서울에서 내려 온 군대와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대장과 모리 테루모토 휘하의 왜군은 진주성 부근에 대치하게 되고 김시민(金時敏)이 지휘한 조선군과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진주성 1차 전투는 경상우병사 유숭인 사천현감 등등 경남 관군들까지 가세하여 진주성 동문 밖에서 전투를 하였으나 일본군이 분대규모의 병력이 대문짝같은 것들로 방패를 쌈아 접근 한 후 조총을 쏘앗기 때문에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경상 남도의 병력과 장수들이 손을 쓰지 못하고 10월 6일 모두 전멸하였다.
유숭인 장군은 경상우병사로 촉망받아서 곧 판서(장관)나 영의증에 승진을 앞두고 있는 유망한 장군으로 일본군 침략으로 휘하 병사들이 모두 전사하자 진주성에(조총이 새잡는 총이 아니라는 사실:군사적 지식제공) 합류하고자 했으나 김시민이 거부했다. 당시는 부하가 없는 장수는 지휘권이 없었는데 원균이 배가 몇척 없다고 설움 받았듯이 유숭인도 큰소리로 꾸짖었으나 김시민은 냉정하게 성아래서 유숭인이 죽는 것을 지켜보았을 뿐 식량에 대한 대책이 없었다.
진주성은 외롭게 적에 포위되어 농성에 들어 갔으나, 당시 진주성에 책임자가 없어 김성일이 김시민을 임시로 진주 목사로 임명했기에 김시민은 자신에 상관들인 경상 남도 수령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진주성 안에 식량이 넉넉하지 않아서 적에게 포위 된다면 위험해서 동문쪽에서 외곽 전투를 하게 되었다.
김면이 경상의병대장에 임명되어 설(배설)은 김면휘하의 의병으로 분류되었으나 독자적으로 도깨비방패를 갖춘 기병으로 하시바 히데카츠부대를 추격하는 과정에 진주성 전투가 벌어지는 가장 중심에 있었든 인물이다. 진주성 전투 당시는 임시 합천군수로 정인홍의 의병과 함께 했는데, 정인홍이 공을 세우기를 좋아해서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문중에서 알려져있다.
진주 외곽전투에 의병대장 곽재우(郭再祐 배설 장군의 아들 등암)의 응원 하였다. 이 싸움의 승리로 모든 경상우도 지역을 보존하였고, 일본 침략군이 호남지방을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부상진 전투와 지례전투 개산진 전투에 성주성을 탈환하므로 경상 우도를 적으로부터 탈환한 것이고, 허리가 잘린 일본군이 남하하기 시작했다.
배설 장군의 도깨비 방패,
배설의 군대는 적이 퇴각하면 추격하고 적이 진격하면 후퇴하는 고도의 기동력과 방패를 가지고 심리전을 펼쳤는데, 진주성 전투중에는 적군이 잠을 자지 못하도록 기병들이 횄불을 들고 소리를 지르며 진주성 외곽에서 외곽으로 부대들이 이동하고 적에 식량부대를 급습하였다.
진주성 전투가 수차례의 공성전으로 패색이 짙어진 이유로 식량이 고갈 된 상태에 거의 모든 지휘관들이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9일 아침에 왜군들은 개산아비(기름종이 사갓을 쓰고 수건으로 마스크를 한 염쟁이:김해 사람들)들을 각부대에 대기시키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일본군이 자신들의 승리하면 모두 코를 배어 염장하는 준비를 하는 것으로 보였고, 성안에 어린이와 노인들이 울음이 그치지 않았는데 공포가 성을 휩쓸었는 중에 이날 대공세로 김시민이 중상으로 스러졌다.
설(배설)은 사태가 위중함을 직감하고 전면적인 9일 낮부터 설(배설)의 부대와 곽재우(배설의 장남 등암 자장) 부대가 진주성 외곽에서 일본군 배후를 위협하고자 하자 일본군은 전군이 설의 부대를 먼저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설의 부대와 전면적 전투도중에 설(배설)에게 적의 지휘부의 식량을 탈취 당하고 많은 병력 손실만 입었을 뿐이었다.
배설의 기병 군대가 일본군 외곽에서 9일 밤 자정부터 적의 지휘부에 불을 놓아 적진이 불길에 휩싸이자 놀란 적들이 철군하기 시작해서 새벽녂까지 공세가 지속된 후에 이른 새벽에 대사지를 통해 배설이 진주성에 입성했을때 이미 주민들과 관군들은 식량이 고갈되어 굶주리고 낮빛이 변한 상태였었다고 한다.
그러나 배설의 부대는 기아 상태의 주민들을 독려하고 전투를 주도하였으며 진주성 안에 설(배설)의 깃발과 방패가 보이자 놀란 일본군은 앞다퉈 퇴각하기 시작했고, 일본군이 물러난 이후에 많은 의병들이 계속해서 진주성에 들어 왔다.
10월7일 (셋째 날)
왜군은 하루 종일 조총과 활로 성을 공격하고 모든 민가를 다 불태웠다. 밤에는 왜군은 붙잡은 아이들을 성 주위에 풀어 소리를 지르게 했다. “한양이 함락되고 8도가 무너졌다. 오늘 저녁에 우리 장수 개산(介山)아비가 오면 너희 장수의 목을 당장 깃대 위에 달 것이다.”
" 9일 사람도 피곤하고 말도 피곤하고... 전라우의병장 최경회가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바야흐로 단성에 머물러서 합천(배설)군사를 만나 진주로 전진하니, 피란하는 남녀들이 “ 합천 군사가 잇달아 올 것이니 잠깐이나마 죽음을 면하겠구나.” 하다.
9일 일본군은 설(배설)의 부대에 전면 공격을 가했고 한 편 진주성 포위망을 조이면서 개산 아비(介山父) 들이 9일 대거 등장 염을 준비하는 일본군 모습에 진주성 어린 아이들과 노인들이 극도의 공포로 병사들은 굶주려 있었다.
다음날 대공세를 막기위해 밤 자정무렵부터 설의 기병대가 적장에 막사와 건초 병참 진에 불를 놓아 여러 진영을 불태우고서는 혼란을 틈타 북문을 열고 진주성에 설(배설 합천군사)이 입성했다.
동문 쪽 전투가 한창일 때에 왜군 1만여 명이 어둠을 타고 북문을 공격했다. 긴 사다리와 방패를 이용한 일시의 공격에 성문을 지키던 군사들이 모두 놀라 한 순간 무너졌다. 최덕량과 군관 이눌 윤사복이 죽기를 무릅쓰고 흩어졌던 전세를 겨우 수습했다.
진주성 안에는 노약자, 어린아이, 아낙네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돌과 불을 던져 성안의 기와, 돌멩이, 지붕 덮은 짚까지 거의 다 없어졌고 조약돌 하나도 식량 한톨도 남은게 없었다.
마침내 다응날 일본군은 배설의 부대가 진주성위에 보이자 앞다투어 진열을 가다듬지도 못하고 김해 거제방향으로 자신들의 주군이 있는 거제로 퇴각했다.
일본군은 지휘부가 기습으로 식량이 털리고 장수들 막사가 불탓으며 일본군은 전쟁 총 잭임자인 하시바 히데카츠가 거제도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서로 살려고 10 일부터 모든 포위망을 풀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진주대첩,
임진왜란을 총지휘하던 하시바 히게카츠가 조선을 영지로 받아 한양행 도중에 성주성에서 의병 세루 부대와 전투도중 중상을 입고 칠천도로 이동 중에 있었으며, 배설이 계속 추격하자 진주성에서 대규모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전투는 조선을 영지로 받은 하시바 히데카츠가 사망하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는데 진주성 대첩 중에 하시바 히데 카츠가 칠천도에서 끝내 사망하고 말았는데 배설이 일본으로 돌아가게 해준 갈비뼈 상실 상처부위가 덧나서라고 한다. 진주대첩은 임진왜란에서 침략군 지휘부가 괴멸된 상태에서 조선군이 최초로 수성(守成)에 성공한 전투로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전투이다.
1592년 10월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목사 김시민은 북장대(서장대라는 주장도 있음) 위에서 전투를 지휘하다가 가고시마 군대로부터 큰 부상을 당했고, 김시민이 사망하자 김시민 장군을 대신해서 진주성을 개수하고 병간호를 하고 있던 배설이 김시민 장군이 전사하기 직전에 진주 목사로 제수 되었다.
배설의 군대가 모리 테루모토의 7군 적본진을 방패 기병대로 통과하고 하시바 히데카츠의(10월5일 저녁 칠천도에서 사망) 부상병들을 추격하여 진주성 전투 중에는 진주 외곽에서 식량을 탈취하여 왜군을 압박하다가 진주성에 양식이 떨어져 패색이 짙진 6만 생명을 구출하기 위해 배설의 기병대가 입성하여 지원하여 진주성 대첩의 승리를 안겨주었는데, 기병 방패부대로 유명했던 '세루'에 놀란 일본 대군을 철 수 시켰다.
이에 실제 진주성을 장악한 배설에게 28일 선조는 다시 진주목사로 제수 하였다.
우연히 진주성에 입성한 것이 아니라 왜군들이 진주성을 함락시키는했지만 진주 외곽 전투에서 배설에게 패배한 왜군들은 배설이 진주성을 향해 진격하자 철 수 한 것이다. 배설이 진주성이 안정을 되찾을 무렵, 왜군들은 강화회담을 하면서 부산포에서 울산에 이르도록 자신들의 성을 쌓고 촌락 집을 개축해서생활 근거지를 만들고 있었다.
이에 선조는 다시 배설장군을 부산 첨절제사 겸 동래부사로 임명하여 왜적들의 활동을 와해하려고 차출 하였다.
진주성 대첩에서 일본군에 포위된채 식량이 떨어진 상태에 있을 긴박한 순간에 진주외곽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일본군 식량까지 탈취하여 진주성에 입성하여 김시민장군을 대신해서 진주성을 장악했었음에도 배설이 세도가나 만석지기가 아니였기에 의병 대장에 오르지 못하고 무주 공산이 된 진주목사에 제수되었었다. 이미 배설이 진주성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상태에 있었다.
진주목사로 제수되자, 혜청이란 식량 창고를 만들과 군량을 비축하고 백성을 구휼하면서 몽진하는 조정에 부정부패를 일신해야 한다는 '시무상주'를 선조에게 올렸다. 이에 조정 대신들(권율)이 배설을 선산부사 금오산별장으로 전출 시키게 된다. 배설이 선산부사로 좌천 된 이후 일어난 제 2차 진주성 전투에서 6만여 병사들이 전원 전사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진주성 대첩에 민관의 협동을 위해 노력한 배설의 치적이 비문에 남았었다.
"선산부사로 좌천되어서도 배설은 사명대사를 비롯한 백성들을 모아 금오산성을 중수하고 무기를 만들과 길쌈과 농사를 짖게하였다. 배설이 선산부사 금오산별장이 되어 사명대사를 참모로 등요하여 부관으로 산성(山城)을 수축하고 개축하는데 성심을 다하게하니, 팔공산성(八公山城), 금오산성(金烏山城)과 용기산성(龍起山城), 악견산성(岳堅山城), 미숭산성(美崇山城), 부산산성(釜山山城),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천생산 배틀산성 을 수축하게하고 촌락을 만들어 길삼과 농업을 하게하고 보호하였으며,"
금오산성에 혜창을 만들어 식량을 백성들에게 배풀었는데 배설이 역모로 몰려 희생된 이후에도 사명대사는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동포들을 구해왔다.(주장인 배설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로 알려져있다.)
근데요? 진주성 대첩 "의병들이 진주성을 구했다?"의병이 누구 누구냐고요? 왜? 이름을 기록하면 포상 달라고 할까봐, 관료들 지들끼리 해먹자고 그래 기록하고 죽으면, 무명용사라며 이름도 남기지 못 했습니다. 당시에 배설이 이름만 남긴 것만 봐도 대단한 장수였습니다.
역사의 기록을 봅시다.
김시민은 전투가 있기 1주 전까지만 해도 감사 김수의 지시로 진주성을 버리고 거창의 김면 군 진영에서 설과 합류하였는데, 김성일의 지시로 진주성에 들어왔다. 전 군수 김대명(金大鳴)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손승선(孫承善)을 수성유사(守城有司)로, 허국주(許國柱)와 정유경(鄭惟敬)을 복병장(伏兵將)으로, 하천서(河天瑞)를 군량 책임자로, 강기룡(姜起龍)을 병기 책임자로 하였다. (←난중잡록 임진 5월 20일) 관병은 3800명이고 주민 수만명이 모두 전투에 참여했다.
참전의병 곽재우, 심대승을, 김면,김선을, 정인홍( 김준민)배설, 최강,이달,조응도, 정유경 3,000여 명,기타 의병들 약 10000 명
결국 경상우도병사 유숭인은 진주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 밖에서 사천 현감 정득열 등과 전사했다. 의병 대장이란 요즘의 민방위 반장 또는 시민단체 장과 비슷한 조직으로 명예직으로 정식 관리가 아니므로 월급이나 봉토를 을 수 없는 봉사 조직이어서 낮은 직책의 관리(철밥통)라도 서로 가고자 했는데 진주 목사를 당시 의병 대장들이 차지하지 못했음을 볼 수 있다.
제1차 진주성 대첩이 승리했으니 포상이 내려집니다.
네, 이름도 없는 설(합천군수)이 진주 목사로 제수 됩니다. 약 6만여 주민과 의병들이 모두 함께 싸운 전투에서 이름도 없는 배설이 진주 목사라는 어마어마한 직책에 등용됩니다. 우리나라 역사가 관리 위주로 정리되는 폐해때문에 실제 전투 상보가 자세한게 없습니다. 지금 관청에서 만드는 보고서처럼 당시에도 전혀 전쟁 기록이 없습니다. 일본은 장군들의 종군기가 곧 역사입니다. 아주 사실적이고 지형과 시간까지 기록이 남았는데, 우리나라는 참여한 의병 모두는 무명용사로 처리 됩니다. 그리고 기록은 관청에서 엉터리로 기록 됩니다. 위에 등장 인물들 순서로 보시면 배설의 전투가 어떠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그러니 모든 진주주민이 길을 막고 함께하자고 그랬습니다.
일본인들 눈에는 배세루 조선 수군의 배가 한번 물리면 죽는 지네를 닮은 것으로 극한 공포로 그리고 있다. 분명히 창제귀선과는 모양이 확실하게 다르지만, 김억추 장군이 말하는 장작 귀선의 모습 그대로 장작을 덧대인 대형 함선모양 이다.
배세루 우주선의 모습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의 일대기를 그린 18세기 일본의 장편소설 & #39;에혼다이코기(繪本太閤記)& #39; 6편 권 6에는 알 듯 모를 듯한 그림이 실려 있다. 거대한 배와 뗏목 수준에 불과한 작은 배가 싸우는 장면. 책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다루고 있다. 임진왜란. (그림 글 출처:문화일보 김시덕)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의 일대기를 그린 18세기 일본의 장편소설 ‘에혼다이코기(繪本太閤記)’ 6편 권 6에는 그림이 실려 있다. 거대한 배와 뗏목 수준에 불과한 작은 배(일본)가 싸우는 장면. 책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다루고 있다, 임진왜란. 에도(江戶)시대 일본인들이 듣고 또 읽고 상상한 조선수군의 ‘난공불락’ 배는 거북이보다 지네에 가까웠던 모양, 조선군의 거함의 위압감이 묘한 통쾌함을 준다.)
선조실록,
선조와 대신들이 승진이랍시고 다른데로 보내니, 백성들이 못 가게 막았다는 건 그만큼 민심을 얻었다는 것.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니고 진주성 전투로 함락되었다가 일본군이 철수한 후 되찾은 곳인만큼 피해도 크고 민심도 흉흉해졌을 곳에서 백성들이 "더 머무럴 주세요."라 했다는 건 꽤나 능력발휘를 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원균 장군이 자신에 배가 두세척밖에 없다고 얼마나 이순싱장군에게 까인지 아실 겁니다. 칠천량 그날도 통제사 원균 장군이 직속 지휘한 배는 몆척 안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백의종군한 이순싱 장군님에게 12척 넘겨 준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는 상상이 안가는 것입니다.
물론 전쟁 끝나는 날까지 배설장군의 동생 배즙 장군이 이순싱의 조방장으로 경상 우도수군을 지휘했고요,
선조실록,
선조와 대신들이 승진이랍시고 다른데로 보내니, 백성들이 못 가게 막았다는 건 그만큼 민심을 얻었다는 것.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니고 진주성 전투로 함락되었다가 일본군이 철수한 후 되찾은 곳인만큼 피해도 크고 민심도 흉흉해졌을 곳에서 백성들이 "더 머무럴 주세요."라 했다는 건 꽤나 능력발휘를 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원균 장군이 자신에 배가 두세척밖에 없다고 얼마나 이순싱장군에게 까인지 아실 겁니다. 칠천량 그날도 통제사 원균 장군이 직속 지휘한 배는 몆척 안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백의종군한 이순싱 장군님에게 12척 넘겨 준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는 상상이 안가는 것입니다.
물론 전쟁 끝나는 날까지 배설장군의 동생 배즙 장군이 이순싱의 조방장으로 경상 우도수군을 지휘했습니다. 이 장군님이 전사했다는 난중일기 보심 전사자만 홀로 2층에 남겨 두고 모든 부하들 기라졸들 마저 떠나버립니다. 실질적으로 수군을 지휘한 장수가 배즙 장군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 장군님의 명령은 받았다고 보입니다.
도깨비방패 とうす (토재비 방패)
임진왜란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고려 몽골 연합군의 일본 침략을 복수 하겠다고 전쟁을 잃으켰습니다.
만주를 우량하를 점령 중이던 가토 기요마사는 조선 역관으로부터 '오랑캐'라는 만주 지역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오란카이인들과 한 판 싸워 일본의 용맹함을 보여주겠다!'고 결심하고 침공을 했는데, 구로다 요시타카로부터 (1592년 9월 중순) 하시바 히데카츠와 전국의 뛰어난 일본 무사 24기사들이 모두 설(세루)에게 부상진에서 참극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가토 기요마사는 '세루를 만나면 포수 100여 명을 장전시켜 한꺼번에 쏘아서 조선호랑이(세루)를 날려버렷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구로다 요시타카는 가토의 만주 정벌견해를 일축하고 무조건 남하를 명령했다.
이에 구로다 요시타카는 '세루는 토재비(토스..) 방패를 휴대하고 기병으로 일본군 부대 30보 가까이서 물러나지 않고 계속 공수를 하여 일본군 꼬리에 붙은 지네와 같다면서 일본군 부대 좌측에붙었다가 우측에 붙고 부대에 후미에 바짝붙어 15시간 넘는 지구전을 감행하는 설(세루)의 부대에 무계진에서는 수백명의 일본군이 전사했다.'일본군은 양때처럼 이리저리 휘둘리고 세루부대는 그야 말로 조선의 호랑이같이 혹여 일본군 장수가 튀어 나가면 설(배설)이 바로 베어버린다.
가장 먼저 중국 만주까지 진출한 가토로서는 자신에 공이 무너지는 상태보다도 구로다 요시타카의 설명을 듣고 마냥 만주로 진격했다가 닥칠 식량보급문제 때문에 먼저 남하하여 설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구로다 요시타카의 말 그대로라면 세루가 바로 성경에 나오는 삼손같은 무서운 인물이라고 생각하는데, 자신에 심복 가토 상월이 배설에게 당했다는게 믿어지지 않았지만, 명령에 따르기로 하고 적극 세루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루토스(せるとうす)"방패의 재료 나무의 거대한 옹이 입니다.
성주에는 지세와 풍수로 드러누운 자세를 보이는데, 성주 왕버들(천연기념물403호) 군락 숲을 보시면 와룡매가 이해되실 것입니다. 왜군들이 왕버들은 뽑아가지 않아서 지금도 수십 그루가 군락을 이루며 모양을 유지하는데 비해 성주군 수륜면 일대의 매화원에는 임진왜란때 도쿠가와 히다테와 마사무네 등등의 일본군 약탈로 매화나무가 아예 씨가 말라버렸습니다.
배설 장군의 도깨비 방패, とうす
"세루토스(せるとうす)"위에 왕버들 나무의 옹이를 이용하여 만든 전통적 도깨비문양의 방패의 모습으로 보기처럼 총알이 뚤지 못할 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적치하에 고통받는 향병들을 규합한 이유는 스스로 싸우고자 하는 병사들을 훈련시켜 강군을 양성하였다는 점이 조선의 세루부대의 특징이다. 향병이란 스스로 싸우고자 하는 병사들로 전투가 힘드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게 적을 물리치면 승리감도 맛보게 해주기 위해 훈련도 지구력이 필요한 장시간 김천 벌판에서 밤마다 훈련을 했던 모양이다. 적과 실제 조우해서도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근접 전투를 하는 것이 세루 부대의 특징이 보인다.
이로 인해 적들은 지쳐 도주하려고 해도 계속 따라붙어 공세를 취하기 때문에 굶주려야 했는데, 식량을 털어내면 전투가 중단되는 것을 알고는 세루부대가 나타나면 아예 식량을 버리고 도주하였는데 일본 장수들의 영이 써지 않았다고한다.
일본 통일 과정에서도 보통 전투는 몇시간 내에 끝나고 조선 정벌 중에도 대부분 전투가 몇 시간내에 끝났었다. 그러나 세루의 부대와의 전투는 보통 15시간 동안의 혈전이다. 당시 조선의 인구는 약 1200만 병력은 120만 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모든 전투에서 신속하게 참패하였기 때문에 일본군은 모든 조선군이 그러하리라는 안이한 인식으로 성주 부상진에서 조선왕으로 봉한 하시바 히데카츠(제9군 대장)가 설의 부대를 추격하다가 대 참극을 빚게 된 것이다.
9일(朝鮮曆 10일)의 진시(辰時:오전 8시경)부터 적이 공격해 왔다. 철(鐵)로 요해(要害)하여 석화시(石火矢), 봉화시(棒火矢), 오가리마따(大狩鉢) 등을 쏘면서 유시(酉時,오후 6시경)까지 번갈아 달려들어 쏘아대어 다락에서 복도, 테두리밑의 방패에 이르기까지 모두 격파되고 말았다. (일본측 기록)
일본군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전투를 경험,
채격이나 신장이 우수한 조선인의 특징을 최대한 활용한 지구전에 일본군들이 배설을 가장 피하고 싶어 한 이유가 바로 성실하고 끈기를 가진 전투때문 이었다. 배설 군대의 전투적 장기지구전과 근접 전투 특징이 외계인 또는 우주인들이라는 인식을 심어 준것으로 보인다.
일본 문헌에서 조선 최강의 장수로 등장하는 가토 기요마사를 잡으려는 “세루토스(せるとうす)”라는 이름의 용맹한 거인 장군, 특히 에도 시대 일본 문헌에 등장하는 조선인 중에서도 불패(不敗)의 장군 영웅신화의 주인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일본의 임진왜란 기록에 나타나는 용맹한 조선인들의 모습, 임진왜란 당시 적군이었던 조선인들에 대한 기록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시대 200여 년간 문학이었던 오제 호안(小?甫庵)의 『다이코기(太閤記)』『에이리 다이코기(繪入太閤記)』, 임진왜란 관련 문헌 『에혼 조선군기(繪本朝鮮軍記)』, 『에혼 다이코기(繪本太閤記)』,『에혼 조선정벌기(繪本朝鮮征伐記)』
장군의 유문.
排泄将軍の(遺文)セルの 1599年 3月 6日
<夕日(夕陽)のドアの外に道は東西(東西)に分かれていた>
- 東西 -
夕陽 之 門
路 東西
兩家 之 好
萬福 之 源
<東西和合だけが国の復興の源である>
東西両家(兩家之好萬福之源)という句である。
現在もこの文句は、宗家の子孫価のアーカイブされた魂ことよく保存されている。同人とソが調和しなければなら国に満腹に来る意味に解釈する。激しい党争をなぞらえ書いた市区に子孫に家庭国和合の重要性を悟らせて与えようとしたものである。
장군이 동인 조정으로부터 탄핵된 후 남긴 시조.
경상도 대량 학살을 막아낸 것은 배설과 의병들의 활약이었음은 분명하다. 반면 칠천량 패전으로 호남의 대량 학살을 막기위해 청야전술을 시행하면서 끝내 탄핵으로 대량 학살을 막지 못한 배설이 당시 심경을 읊은 시조이다.
月波亭(月パジョ1597年09月02日)
靑山(清算)ああ、
デョヒていただ
綠水ㅣ(ノクスが)だうれしい
無情(無情)した山水(算数)も
あるかうれしいば
ましてや)有情(油井)した様だニルロムスムハリオ。
一昨日いつ突進
このように
ジョリ行く第
月波亭(月パジョン)発根ダルエ
ヌィスルを食べた警固
鎭江(錦江)の輝ドゥンヌン編みが
昨日ロンガせよ。
排泄は歌、
熊川海戦で倭船600隻を全滅させていた盲腸である。しかし、その次の閑山島海戦では、敵に惨敗をした。
長い水中生活に全身は病気が聞いて、
敗戦の屈辱に心もうすらぞくぞくである。周りを見回してみると、
青い山々が屏風のように取り囲んでいる。変わらない。
「清算ああよくあったのか?」「青いムルア君嬉しいね。」
世界はそのように暖かくしていがないから海を駆け巡るた盲腸の胸がどうして火に燃えて真っ黒に足かせとなり、か運賃。
晋州城で恨みを、
加藤、小西 ソソヘンジャン、ドードーダッカドラ、九鬼嘉隆, 島津義弘 水軍を抜いて鹿児島薩摩の部隊を撃破した熊川海戦がようにね
義明と決戦がで殺すことができたが、腕だけを要求した。?
殺すことあったが、
羽柴秀勝が思い出し生かし見た。
壬辰倭乱侵略を停止し、
朝鮮、日本の友好同盟を認識させようと
川岸に青い柳の、友と酒一杯交わしたその時遥かある。ただし柳が、
その葉であり、茎がディッキー精子で月光立ちこめ酒を交わしていたことが、
まるで昨日のであるよう考慮される姉。
戦争を終わらせ者、黒田吉高伊達政宗羽柴秀勝それら浮上させ、返し送信は、
豊臣秀吉が長寿が負傷したままに侵略を主張することを報告侵略を停止を心を持つようにしようと常であった。
。徳川ヒダて義昭を殺すことができる場で九死に一生の機会を与えた。
しかし、戦争は終わらず陰謀と謀略で弾劾されて病気の治療のために帰郷する必要が常であった.
排泄は、日本軍の全滅ではなく、艦砲で打撃を加えて防御をしようということであった。何とか日本軍の意志を折っ撤退させようと風シンスギルと戦っていた。したがって、日本の兵士たちを無害ず者、日本軍長寿の酒宴負傷を負わせた。羽柴秀勝の肋骨、黒田吉高マー事務はい義明殺さなかった。、戦国時代の日本での障害者が一般的になることがなかった。
일본 교토의 코무덤은 수십만명의 코가 묻혀 있고, 오까야마현(岡山縣) 비젠시 야산에 묻힌 2만여명의 코무덤이 400여년만에 발견되었듯이 일본 전국에 코무덤이 산재하고 있는데 대부분이 정유재란 호남인의 희생이있었다.
임진왜란 중에 가장 많은 적군을 죽인 장수는 단연 이순신 장군이다. 기록 대로라면 약 158.000명의 적군을 사살 한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명량 노량 해전에서 약 6만 명을 죽였다는 주장이 있다. 전세계에 전무 후무한 전공을 올린 이순신 장군의 위대성이 난중일기에 기록 되어 있다.
이순신과 같은 시대에 전란 속에서 장군들이 공을 세우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든 시기에 배설은 관료들이 치부와 승진을 위한 수탈을 막아보고자 '부정부패 척결'을 상주하여(선산부사로 좌천된 사이 진주주민 6만명이 학살되었다.)왕조의 장수가 아니라 의병으로 백성의 장수로 일생을 마쳤었다.
이순신 장군처럼 일본군을 대량 사살하지는 못한 것은 사실이나 임진왜란에서 백성들을 적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한 숫자로 말하면 단연 1등에 비교불가 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모함으로 누명을 쓰고 운명하고 6년 만에 선조 1등 공신에 책봉되고 묘지장산은 조선 왕조 전무후무한 6.000만 평을 하사받았다.(주회20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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